시험공부하다가 또 뽀르르 나왔어. 서인이는 시험 공부기간에 나하고 책 보고 문제 푸는 시간보다 얘기하는 시간이 더 많을 걸. 책 펴놓고 공부하다가 선생님 말 생각나면 나와서 그 얘기 해야 하고, 욕할 것 생각나면 욕하고 들어가야 하고. 아무튼 그래서 시험공부 시작하면 그 얘기 들어주는 일도 제법 한 몫 한다니까. 하여튼 좀 웃기는 아이야. 공부하다가 할 말이 떠올랐는데 그 말을 안 하면 그 생각만 자꾸 몽실몽실 커져서 공부한 내용이 들어갈 자리가 없대. 그래서 공부 능률이 안 오른다나? 욕할 걸 자꾸자꾸 해서 없애야만 공부 한 것이 저장된다나?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지만 난 이렇게 어미 노릇을 하고 있어. 서인이가 뽀르르 나와서 종알종알 얘기하면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고 함께 욕 좀 해주다가, 함께 잘난 척해서 기분도 좀 살려줬다가. 그게 도움된다면 해줘야지 뭐. 어릴 때 지 혼자 크도록 너무 버려두었으니 지금이라도 그 빚을 갚는다 생각하고 있어.
말이 빚 갚는다는 것이지, 이렇게 서인이가 뽀르르 나올 때마다 사실은 내 기분도 좋아져. 옆에서 서인이가 종알종알 할 때면 꼭 이쁜 새가 지즐대는 것 같아. 누군가 내 옆에서 눈을 마주하면서 지주굴지주굴 얘기해 줄 동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시험공부랍시고 오래 전에 필기해 둔 공책을 보다가 조르르 나왔어.
“아, 우리 반에 누구누구 몇 명 있거든요. 지는 꼭 공부에 관심 없는 척 해요. '나는 공부 안하고 멋지게 쨀 수 있는데 너거는 그래 공부에 목숨 거나' 하는 것처럼 우리를 완전 비웃는 거 같든요. 그래놓고 시험 칠 때 되니까 내 공책 빌려달라잖아요. 복사하고 금방 준다 해놓고 이틀이나 있다가 주는 거 있죠? 완전 얄미운 거 있죠?”
“진짜 웃긴다. 뭐 그런 아이가 다 있노? 빌려주기는 왜 빌려주노?”
“안 빌려주면 더 귀찮아요. 자꾸 말 걸고. 공책이라도 빌려줘야 교실이 조용해요.”
“그거 가지고 공부 하기는 할까? 남이 애써 정리해 놓은 거 가지고 달달 외우면 효과가 있겠나? 완전 네가지 없네.”
“몰라요. 그래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는 게 쪼꼼 귀여워서 그냥 줬어요.”
“그기 귀엽나? 이틀이나 안 돌려줬다메? 그라머 니는 공부 우예 했노?”
“나는 뭐어 다른 거 먼저 했지요. 시험 끝나면요, 쉬는 시간에 갸들이 제일 먼저 '니 몇 개 틀렸노? 나 이번에 좀 올랐다.' 하고 다니거든요."
"그래, 좀 오르긴 올랐더나?"
"그러니까 귀엽지요. 올랐다고 막 좋아하는데 50점 간당간당 하거든요. 그래도 엄청 밝아요. 아아들이."
"하긴. 50점이나 90점이나 그기 그거지뭐."
"엄마 나 들어가요, 이번에는 30분 동안 안 나올게요.”
맞장구치면서 기분맞춰 주니까 금방 풀려서 들어갔어.
이럴 때 '성적이 다가 아니다, 니가 그 아이들 따뜻하게 대해줘라, 그 아이들도 장점이 있을 끼다' 뭐어 그런 '귀한 말씀'은 별로 귀에 안 들어가거든. 지랑 내랑 수준맞춰 종알거리다 보니 스스로 그 아이들 귀엽다고 하잖아. 내가 서인이를 이뻐하는 점이 바로 그거거든. 아이들을 별로 미워하지 않는다는 거야. 근데 지 말대로 한 30분 동안은 안 나올려나 했는데 웬걸, 또 나오네.
“와아~ 엄마 우리 교장쌤, 진짜 웃겨요. 하다가하다가 안되니까 인자 고무줄 색깔까지 다 간섭하고 금지하는 거 있죠?”
이번에는 도대체 뭔 공부를 했길래 교장선생님 욕이 하고 싶어졌을까?
“머리 묶는 고무줄 있지요? 색색깔 있는 거. 한 봉지에 500원하는 거요.”
“노랑 고무줄 만한 거 그거?”
“예. 고무줄 한 수무개쯤 들었는데 500원이거든요. 흰 거 보라색 빨간색 뭐어 여러 가지 들었는데요. 인자 그 고무줄로 머리 묶는 것도 안 된대요.”
“그거 쪼꼬매서 머리 묶으면 뭔 색인지 잘 보이지도 않을걸?”
“그러니까요. 할매가 웃겨요.”
“니는 뭐 묶을 머리도 없다 아이가. 짧은 머리 묶을 일도 없는데 고마 신경 쓰지 말래미.”
“듣기만 해도 짜증나잖아요. 머리 묶어라 해서 묶었으면 교칙 잘 지키는 거 아니예요? 머리 묶는 고무줄 그거 색깔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그거까지 금지하는지. 나는 그런 게 맘에 안 든다는 거지요. 자기는 완전 빨간 바지에 초록색 블라우스 그런 거 입고 오면서.”
“빨간 바지에 초록색 블라우스? 야아 진짜 촌시럽겠다.”
“그럼요, 옷을 완전 칼라풀하게 입는데, 그게 진짜 촌시럽게 칼라풀하게 입는다는 거 아니예요.”
“할매가 옷 입을 줄 모르는 갑네?”
“완전 감각 없어요. 그러면서 아이들이 매는 쪼꼬만 고무줄에 칼라 있다고 안 된다는 거예요.”
“야아, 김서인. 너거들이 너무 예쁘니까 교장쌤이 질투 나서 그라는 거 아닐까가? 너거는 청춘 그것만 해도 자체발광이잖아.”
내 말이 어이없다는 듯, '참 엄마도 그기 말이가?' 하는 듯 입을 조금 삐죽거리더마는 금방 맞장구를 치네. 서인이의 이런 점도 이뻐.
“그러까?”
“아무래도 할매가, 자기는 꾸며도 꾸며도 안 이뿐데 너거는 고무줄만 다르게 묶어도 이뿌니까 샘나는 갑다.”
“그런가?”
“우야노, 고마 젊은 너거가 이해해라. ‘이쁜 것이 죄가?’ 그라고 용서해삐라. 엄마도 나이 들어보니까 젊고 탱탱한 것들 볼 때마다 ‘너거는 참 좋겠다’ 싶을 때가 있더라고.”
“하기는, 교장 할매는 꾸민다고 용쓰는 것 같은데 태가 안나.”
“그러니까. 너거는 고무줄 하나 바꿔도 빛이 나는 자체발광 청춘이 있다 아이가. 고마 너거가 너그럽게 용서해라.”
“알았어요. 아, 할매 진짜.....”
이렇게 할매 욕 좀 하고 또 들어갔어. 흐흐 어쨌든 어서 욕 마치고 공부하러 들여보내는 거는 성공했어.
은혜야, 근데 나도 자꾸자꾸 야매가 되어가는 거 같지 않나? 그 장면에서 학생 인권이 어쩌고, 교장도 뭔 철학이 있겠지 하고 길게 늘어놓을 장면은 아니지 싶긴 하다만 그래도 내가 슬슬 야매가 되어가긴 가는 거야. 그지? 그래도 서인이가 동무한테 맘 상하면 동무 욕도 함께 해주고, 교장쌤 욕하면 함께 씹어주고 흐흐. 근데 이게 심각하고 진지한 것 보다 훨씬 서인이를 덜 피곤하게 하는 거 같거든. 지 스스로 뭔가 좀 용서하고 지 수준에서 이해할 건 하고 뭐어 그런 거 같아.
안녕. 담에 또 연락할게. 파란보리 다시 나오기 전에 니 한테 쓰는 글 마무리할려는데 또 언제 보르르 나올지 몰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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