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우리 할매
“인자 부산 안 간다. 우리 강생이들 하고 있을 끼다.”
“와, 진짜? 인자 부산 안 가도 된다고예?”
“그럼. 작은 오래비는 군대 갔고, 셋째는 대학이 대구에 있으니 대구로 갈 끼고. 큰 오래비는 혼자 있어도 된다카네.”
설을 쇠자 할매는 이제 부산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할매는 야야네 오빠들 공부뒷바라지 하느라 몇 해 동안 부산에서 살았다.
“야호!”
야야는 절로 신이 났다. 드디어 날마다 날마다 할매랑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야야는 다른 동무들이 할매 손을 잡고 가는 뒷모습만 보아도 부러웠다. 동네에서 아이들끼리 다투고 있을 때 앞뒤 사정 들어보지도 않고 자기들 손주 편만 들면서 욕을 퍼 붓는 할매들을 보면서도 야야는 할매 생각이 간절했다. 어린아이들에게 사나운 욕을 하는 모습이 어찌나 그악스러운지 살이 떨리게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부럽기도 했다.
‘이제부턴 하루 이틀만 자고 아쉽게 할매를 보내는 일은 없겠네.’
그날 야야는 온종일 흥얼거렸다.
야야는 할매가 참 좋다. 머리를 곱게 빗고 모시적삼을 빳빳하게 다려 입은 할매는 늘 단정하고 고왔다. 가끔 고샅에서 누구에겐가 욕을 퍼붓고 악다구니를 해대는 감사나운 이웃 할매들하고는 사뭇 달랐다. 욕은커녕 집안사람 누구에게도 큰소리로 화를 내는 일도 없었다. 동네에서 만나는 젊은 새댁들한테도 함부로 낮잡아 말하지 않았다. 몇 달에 한 번씩 들르는 인삼장수 할머니가 와도 반가운 손님처럼 살갑게 맞아주고 꼭 재워 보냈다. 여섯이나 되는 손주들 키우면서 손바닥으로 엉덩이 때리는 시늉 한 번 하지 않았다. 말수도 많지 않고 엄전한 할매지만 사람들한테는 늘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언제나 꼿꼿하고 점잔하기만한 엄마하고도 달랐다.
야야는 할매 옆에 꼭 붙어 앉아 어리광부릴 때도 정말 좋았다. 할매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주고 엉덩이를 톡톡 치면서 “아이구우, 우리 강생이!” “아이구 우리 이삐!” 하면서 언제나 듬뿍 사랑해 주었다. 바람결을 따라 뱅글뱅글 춤추며 높이높이 떠오르는 가오리연처럼 야야는 그럴 때마다 하늘에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다. 콧잔등이 간질간질 하면서 입이 저절로 벙싯벙싯했다.
마을회관 앞 방울나무 그늘에서 할매 무릎이라도 베고 누우면 해가 넘어가고 어스레해질 때까지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할매 무릎을 베고 누워서 보면 넓적한 방울나무 이파리들 사이로 반짝거리는 햇빛 조각들이 더욱 눈부셨다. 야야는 그런 해낙낙한 기분으로 나무그늘 둘레에서 뛰어 노는 동무들을 보는 것도 무척 좋았다.
할매는 야야가 모르는 수수께끼도 많이 알았다.
“저 들엣 것 다 잡아 묵고, 물엣 것도 다 잡아 묵고, 산엣 것 까지 넘보는 넘이 뭣이겠노?”
“불가사리?”
“아니.”
“용가리?”
“아아니.”
야야가 코맹맹이 소리로 이것저것 주워섬기면 할매는 끝까지 느물느물 웃으면서 감질나게 했다. 할매랑 그렇게 노닥노닥하면 더없이 재미있고 즐거웠다.
할매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는 또 얼마나 재미있는지. 할매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 거의 외우다시피 했지만 야야는 “또 해주세요. 또 또” 하고 졸라댔다. 할매한테는 똑같은 이야기라도 할 때마다 새롭게, 하면할수록 더욱더 재미나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할매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엄마가 지금쯤 돌아왔겠지?’
대문 앞에 오자 엄마가 오리알을 구하러 간다던 말이 떠올랐다.
“할매예!”
방에는 할매도 있고 누군가 있을텐데! 물 끼얹은 듯 조용하고 기척도 없다.
“할매예!”
집안이 너무나 고즈넉한 것이 야야를 더 불안하고 초조하게 한다.
“엄마!”
축담에 올라서자마자 가방을 아무렇게나 놓아버리고 큰방으로 들어간다. 할매는 아침에 본 모습 그대로 누워 있다.
“할매예!”
야야가 조금 더 큰 소리로 부르며 다가가 앉는데도 아무 말도 못하고 누워만 있다. 할매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지 입을 옴찔거려보지만 입만 흉하게 일그러질 뿐 말이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말이 안 되니 얼마나 답답할까. 목에 핏대가 불거지고 눈가 힘줄이 툭 튀어나오도록 용을 쓴다. 그래도 할매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하아 하아’ ‘하아아악’
할매는 입이며 목을 자꾸만 움찔거리며 있는 기운을 다 쏟아내더니 금세 기운이 까라져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야야는 겁이 더럭 났다. 불뚝불뚝 불거지는 핏줄을 보니 할매 몸에 있는 핏줄이란 핏줄이 모두 터질 것만 같았다.
“할매예, 뭐라꼬예? 예? 할매예!”
꼭 할 말이 있는 듯 할매가 온 힘을 모아 입을 움찔거린다. 야야는 할매 손을 꼭 잡고 할매 입에다 귀를 갖다 댄다.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입만 움찔거릴 뿐 말은 나오지 않는다.
“야야, 할매 용쓰게 하면 안 된다. 옆에서 자꾸 이카면 할매가 더 마음이 괴롭고 한탄스러워서 머리 핏줄이 더 터진다 카더라.”
할매 요강을 씻어 들어오던 작은집 아지매가 야야를 뜯어내어 멀찌감치 앉혔다.
오리 알을 구하러 간 엄마는 아직도 오지 않은 모양이다. 어제는 읍내 인산의원에서 의사가 와서 두어 시간이나 들여다보다 갔다. 의사는 주사를 놓지도 않고 약도 주지 않고 뭐라뭐라 열심히 말만 하고 갔다. 엄마 아버지는 그저 듣기만 하다가 할매 손을 하나씩 나눠 잡고 고개를 떨구었다. 동네 어른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왔다가 한 마디씩 하고 갔다.
“아무래도 중풍이 왔는갑다. 자고 일어나면서 그러는 수가 종종 있다더만.”
“무다이 손에 힘이 빠지고 혀가 꼬여서 말을 못하는 것 보면 중풍 온 기 맞는가베.”
“느긋하이 마음 잡수소. 긴 병에는 병구완하는 사람이 마음을 눅게 잡숴야 돼.”
본동양반 침도 별 수 없고, 의사가 와도 약도 없다 주사도 소용없다 하니 이제 엄마가 나섰다. 엄마는 그저께부터 오리알을 구하러 다녔다. 아래윗뜸을 다 헤더듬고 다녔지만 동네에서는 오리알을 구하지 못했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강가 해양마을에 오리 키우는 집이 있다더라고 반가워했다. 시오릿길을 다녀오자면 밥 먹고 바로 나서야한다고 서둘렀다.
‘오리알만 있으면 할매가 나을 수 있을까?’
‘엄마가 오리알은 꼭 구해 오겠지?’
야야는 할매한테 아무 것도 해 줄 게 없는 것이 답답해서 어정버정하다가 혹시나 싶어 물을 떠다가 두어 숟갈 떠 넣어드리고. 그러나 할매 입으로는 여전히 반도 들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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