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체험학습
“내일부터 사흘 동안 가정체험학습입니다. 집에 한창 바쁠 때니까 부모님 도와서 들일도 해보고 집안일도 거들어드리고! 모두 알차게 보내고 월요일에 만나요.”
해마다 하는 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아이들은 “와아!” 소리쳤다. 집에서 일을 하든 어쨌든 학교를 며칠 쉰다는 건 언제나 즐겁다. 이번에는 놀토에 일요일까지 끼어서 닷새나 쉴 수 있다. 농사일이 없는 집 아이들은 실컷 놀 수 있게 생겼다고 몇 주 전부터 기다렸다.
봄에는 야야도 다른 동무들처럼 “와아아” 소리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나 가을철 가정학습기간이 다가오면서 며칠 전부터 야야는 기운이 쭈욱 빠져있었다.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하루 온종일 야야 몫이 될 할매를 생각하니 미리부터 맥이 빠졌던 것이다.
‘아이고, 한 며칠은 꼼짝없이 할매랑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야겠구나.’
‘이건 뭐, 가정체험학습이 아니고 지옥체험학습이네.’
야야는 차라리 학교에 오는 게 훨씬 낫겠다 싶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할매 생각일랑 잊고 동무들처럼 쏘다니면서 떠들고 놀 수 있었는데.
‘에이, 뭐 하러 체험학습은 하는지. 아이들이 농사일 한다면 얼마나 한다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나 열심히 하면 되지.’
야야가 그러거나 말거나 동무들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물 빠지듯이 교실을 빠져나갔다. 하나둘 멀어지는 동무들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서 터덜터덜 걷다보니 참 재미가 없다. 언제부턴지 집에 가는 발길이 점점 무거워졌다. 처음에 할매가 아팠을 때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까지 쌩하니 달렸는데, 요즘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겁다.
할매가 마루에 나와 앉아 안장실 할매랑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하고 있다. 엄마가 밭에 나가면서 안장실 할매를 모셔다 준 것이겠지.
‘아, 지금부터 꼼짝없이 이 두 할매랑 살아야겠구나. 5일이야? 6일이야?’
날짜를 꼽아보다 긴 한숨이 나왔다.
“흐이유우우우.”
한숨을 쉬는 것도 아주 버릇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어린아이가 무슨 한숨이고. 한숨 쉬는 것도 버릇이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엄마가 펄쩍뛰면서 싫어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요즘 들어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이 나오는 걸 어쩔 수 없다. 꼼짝없이 두 할매랑 지낼 ‘지옥체험학습’을 생각하니 인사도 하기 싫어졌다. 가방만 던져놓고 사랑방으로 쏙 들어가 누워버렸다.
다음날, 야야 마음이야 어떻든 엄마는 마음 놓고 들일을 나갔다. 아침밥 준비할 때도 느긋하게 들어와서 밥을 먹고 또 들로 나갔다. 엄마가 모처럼 느긋하게 들어와 밥 먹고 들로 나가는 것을 보면서 야야는 마음을 조금 풀었다.
‘그래, 저렇게 힘든 엄마도 아무 말 안하는데.’
엄마가 들로 나가고 마루를 대충 닦아놓고 나서 야야는 일찌감치 안장실 할매를 모시고 왔다. 이래 귀찮으나 저래 귀찮으나. 그래도 두 할매가 함께 있으면 덜 심심해하니까. 말동무라도 있으면 할매는 야야를 덜 괴롭혔다. 안장실 할매가 오자 야야 할매도 목소리가 더 커진다.
“가실이 한창이면, 저 우에 함목 양반 생일이 돼 가제?”
할매들은 어떻게 온 동네 어르신들 생일이며 제삿날을 다 기억하고 있는지. 야야는 들을 때마다 놀라웠다.
“어제그제 보름 지났으니까 사나흘 있으면 그 양반 생일이겠네.”
“그 집 큰아들 장가는 갔는가? 하마 나이가 에북 됐지러?”
“그 영감님은 아직 정정한지 할멈 부르는 소리가 청석골에 쩌렁쩌렁 울리더마는. 여어 앉았어도 다 들리데.”
“그 집도 할멈이 고생이지. 영감이야 주는 밥 묵고 앉아서 방구들만 지키고 앉았는데 뭔 기운이 빠질라꼬?”
안장실 할매 말에 야야네 할매가 발끈 한다.
“그거는 모르는 소리다. 방구들만 지고 사는 넘이 맘고생은 더하지.”
두 할매 이야기는 끝이 날 줄 모른다. 뉘집 아들 장가간 이야기, 며느리 이야기, 누구네 집 대문 새로 달았다는 이야기며 뉘 집에는 가마솥을 새로 걸었다는 이야기까지 온갖 이야기가 다 나왔다. 할매들은 어찌나 기억력이 좋은지 몇 십 년 전 이야기도 생생하게 풀어놓았다. ‘저 이야기는 진짜 한 백번은 들었을 걸.’ 싶은 것도 한 둘이 아니다. 할매들은 아침나절에는 야야를 덜 불렀다. 아침에 만나면 처음 얼마동안은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지겹지 않게 주고받았다. 마당에 암탉이 ‘꾸루룩 꾸루우욱’ 하면서 알자리로 들어간다.
“기팔댁이 둘째 아들, 참 유별나게 크더마는 장가가더니 그래 점잖아질 줄 우예 알았노? ”
야야네 작은아버지 이야기다.
“이집 작은 아들 닭서리 참 마이 했제?”
“저거 형도 어질고 형수가 어질어서 그러고도 배겨났지. 어지간한 사람들이면 아무리 동생이라도 그냥 두겠나? 닭이고 나락이고 얼매나 퍼다 날랐노?”
“그러던 사람이 점잖게 살림하고 사는 거 보면 참.”
“고마운 일이지.”
야야는 두 할매가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걸 들으면서 살그머니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할매들 앞에서 벗어나 누울 수 있는 사랑방이 야야에게는 꿈같은 곳이다. 화나고 심통 날 때마다 사랑방에 혼자 꾹 박혀있다 보면 치료가 되는 것도 같았다.
누워서 데굴데굴 굴러도 보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반듯이 누워 천정에 동글동글한 무늬도 세어보고. 골백번도 더 본 만화책을 보다가, 노래도 나지막하게 틀어놓고 따라 부르고. 숙제도 조금 하다가 학교에서 빌려온 동화책도 좀 읽고. 또 누워서 빙빙 돌다가 두 발로 벽을 ‘팡’차고 튕겨 나오고. 그림 속의 나그네처럼 훌훌 털고 먼 여행도 떠나보고.
‘벌써 이야깃거리가 동이 났나?’
좀 조용하다 싶어 바깥을 살피는데 기다렸다는 듯 할매가 부른다.
“야야, 오줌 좀 누자.”
“예에.”
납작 요강을 가져다 할매를 들어앉혀 오줌을 뉘고 사랑방으로 들어와 엎드렸다.
“야야, 나도 변소 좀 데리고 가자.”
“예에”
이번에는 안장실 할매다. 할매들은 꼭 이렇다. 한 사람이 누고 나면 얼마 안 있어 꼭 따라 했다. 안장실 할매 손을 잡고 뒷간으로 간다. 변기에 자리 잡고 앉을 수 있게 한발 한발 놓아드리면 안장실 할매는 오른쪽 왼쪽 더듬더듬 지팡이로 ‘투둑투둑’ 쳐 보고 앉았다. 야야는 옆에 서서 기다렸다가 할매가 오줌 누고 일어서면 바지를 끌어올려 옷매무새를 매만져드린다.
“야야, 물 한 바가지 떠라. 손도 좀 씻자.”
안장실 할매는 마루로 올라오기 전에 세숫대야에 손을 씻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아이구우 저래 걸어 다니면 얼매나 좋겠노? 변소거리라도 댕기면 좋으련만. 손 씻고 싶으면 손 씻지, 마당도 디뎌보지. 앞이 안 보여도 훠이훠이 걸어 댕기는 당신은 얼매나 좋노?”
자리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덩이를 밀고 다니는 할매가 보면 안장실 할매가 부러울 따름이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 봉사 신세가 부럽단 말이가? 내사 당신이 부럽구마는.”
“아이고, 이 양반아. 훠이훠이 댕기는 거까지는 바라지도 않소. 그저 뒷간에라도 내 걸음으로 가면 아이들한테 요강이라도 안 비우게 하지. 그렇게만 되어도 좋겠구먼.”
안장실 할매가 야야네 할매 손을 꼭 잡으면서 말한다.
“보소, 이 할마이야. 나는 죽기 전에 우리 아들 얼굴 한번만 더 봤으면 좋겠구만. 그 아들 낳아놓고 어찌 고맙던지 하늘보고 절하고 당산 나무 가서 절하고 새밋가 가서도 절하고 나중에는 마굿간에 소를 보고도 절을 했다카이. 그렇게 귀한 우리 아들 얼굴이 인자는 생각도 안 난다. 꿈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구마는. 꿈에서도 아들 얼굴이 안 보인다.”
좀처럼 울지 않는 안장실 할매가 끝에는 결국 울먹거렸다.
“당신이나 내나 쪼매마 더 살다가 자는 숨에 지면 좋으련만. 당신은 내 다리 되어주고, 내는 당신 눈이 되어서 항꾼에 길동무해서 나서면 좋으련만.”
“인자 질 때도 됐구마는, 자슥들 섭섭지 않을만치 견뎠다. 가는 길 외롭지 않구로 길동무해서 가면 좋지. 부처님요 조왕님요 그 복이라도 내려 주이소. 나무관세음보살.”
야야는 두 할매들 이야기를 못들은 척 하지만 눈가가 뜨거워지고 코가 맹맹해져서 그 옆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다시 사랑방으로 건너와 책을 펴놓고 엎드렸는데 앞이 자꾸 흐릿해졌다.
“야아야. 콩 덕석에 달구새끼 좀 쫓아라. 다 까래빈다. 후여, 훠어이.”
“예에.”
야야는 장대를 가져다 ‘훠어이’쫓는 척만 한다. 하루 종일 붙어서 닭을 쫒을 수도 없고, 밖으로 까래벼 놓은 콩은 어차피 덕석 덮을 때 다 쓸어 담고 주워 담아야 하는데 그때 한꺼번에 할 생각이다.
“야야, 콩 한번 갈아라. 해 안에 말릴라카면 자주 갈아줘야 된다.”
“예에.”
야야는 신발을 벗고 콩 덕석으로 들어갔다. 햇볕에 잘 마른 콩이 따끈따끈 간질간질 발바닥에 밟혔다.
“야야, 재떨이 좀 털어 온나.”
“예에.”
“야야, 담뱃대 좀 파내자. 저어기 후비개 좀 찾아오너라.”
‘아아, 또 시작이구나.’
짜증이 서서히 밀려온다. 할매들은 늘 이랬다. 한동안 도란도란 얘기하는가 싶다가 이야깃거리가 끝이 나고 심심해지면 야야를 쉴 새 없이 불렀다. “예에, 예”하고 달려 나가면 해 질 때까지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하는지 모른다. 짜증을 애써 감추면서 “예에에”하고 나가는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장실 할매가 말했다.
“아이구, 야야. 어째 저래 엽렵하고 연한지. 부를 때마다 ‘예에 예’ 연한 배다, 연한 배.”
할매가 맞장구친다.
“세상에 저 보다 연한 배가 있을라고.”
‘칫, 저 할매들이! 인자 살살 달래가면서 부려먹을라고.’
야야는 할매들이 무슨 말을 해도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담뱃대를 판다고 후비개를 찾아오라고 했지만 결국은 야야가 파야한다. 앞이 안 보이는 안장실 할매가 팔 수 있나, 한 손 밖에 못 쓰는 야야 할매가 팔 수 있나. 야야는 후비개를 쿡쿡 찔러 보고 담뱃대를 입에 물고 훅훅 불어 본다. 찐득한 담뱃진이 얼마나 끼었던지 훅훅 불어도 시원하게 빠지지 않는다. 자주 파낸다고 파내는데도 얼마 안 가서 이렇게 뻑뻑하게 막힌다.
‘대충 하지 뭐. 심심해지면 내일이라도 또 파라고 할 걸.’
대강 마무리하고 담뱃대를 드리니 할매가 담배를 꼭꼭 눌러 담고 어느 새 불을 붙여 담뱃대를 뻑뻑 빨면서 말했다.
“아이구우, 우리 강생이 손이 약손이네. 힘 안들이고 빨아지네.”
‘할마씨, 인자는 살살 꼬셔요, 꼬셔. 대강 조금만 했는데, 뭘 자꾸.’
할매들 칭찬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데 옆에서 안장실 할매까지 나서서 거들었다.
“그래, 그래. 영판 입에 혀다.”
“내 입에 혀도 깨물릴 때가 있제. 우리 강생이야 어깃장 한번 놓나. 암만, 입에 혀보다 낫지.”
‘연한 배에, 입에 혀! 또 뭘 갖다 붙일라고?’
할매가 또 “야야” 부른다.
“예에.”
“오줌 한 번 더 누자.”
납작 요강을 가져다 할매를 끌어안아 휙 들어 올리는데 할매가 또 말한다.
“우리 강생이 힘이 덜 들라카면 이 씰데없는 젖통이라도 살이 빠져야 되는데. 젖 먹여 키울 얼라도 없는데 이거는 와 이래 덜렁덜렁 붙어 있는지.”
이때까지 다잡고 있는 마음이 그만 확 풀려버렸다. 픽 웃는 바람에 힘이 풀려 할매를 요강에 털썩 놓쳐버렸다.
“아아참, 할매는. 할매가 그래 말하니까 힘이 안 들어가잖아요.”
화난 듯이 말하면서도 야야는 실실 웃음이 나온다. 할매는 젖가슴이 크고 통통 했다. 다 커서도 할매하고 장난치거나 어리광 부릴 때는 할매 젖가슴을 어루만지고 놀았다. 간지럽다고 손을 떼라고 하면서도 할매는 손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추운 겨울밤에 손을 쑥 집어넣으면 할매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야야는 할매 가슴이 늘 포근하고 따뜻해서 자주 그 짓을 했다.
“젖 먹여 키울 얼라도 없는데 이거는 와 이래 덜렁덜렁 붙어있는지.”
“아아, 할매예. 우리 줄라고 그렇지예.”
야야는 할매 가슴을 파고들면서 아양을 떨곤 했다.
할매한테 말려들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게 무안해진다.
‘아, 알았어예. 할매 인자 안 그럴게예.’
'재불재불 야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매를 불러보세요 14 - 불가사리가 마늘 까는 날 (0) | 2010.09.30 |
---|---|
할매를 불러보세요 13 - 5분만이라도 좋아 (0) | 2010.09.30 |
할매를 불러보세요 11 - 큰못에 물을 펀다는데 (0) | 2010.09.30 |
할매를 불러보세요 10 - 할매까지 다 미워 (0) | 2010.09.30 |
할매를 불러보세요 9 - 학예회 연습도 나 혼자 (0) | 2010.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