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재불 야야 이야기

할매를 불러보세요 13 - 5분만이라도 좋아

야야선미 2010. 9. 30. 17:21

5분만이라도 좋아

차라리 엄마 따라 밭에라도 나가는 게 좋지. 지금쯤 밭에 나가면 야야가 할 일도 많을 텐데. 노르스름하게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콩잎도 딸 수 있고, 고구마 줄기도 딸 수 있다. 그저께 가정체험학습을 시작하고 벌써 사흘이냐 나흘이냐. 야야는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할매하고 씨름하는 것이 이제 지긋지긋하다. 만화책도 보고, 감나무에 고무줄을 매놓고 혼자 폴짝폴짝 고무줄도 넘어보고, 걸레 빨아 마루도 닦아보고. 그러나 무엇을 해도 할매가 마루 끝에 앉아 참견을 해대니, 그러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러제끼고. 마치 감옥에 갇혀서 할매 감시를 받고 있는 것처럼 갑갑하다.

머리라도 시원하게 감고 싶은데 할매 눈치가 보인다. 대야에 물 가득 퍼 올려 시원하게 훌렁훌렁 머리 감는 모습만 보아도 할매는 또 염불을 할 테지.

“나무관세음보살, 새미물 퍼서 시원하이 머리 한 번만 감아보면 얼매나 개운하겠노?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보소 보소 영감요, 내한테도 그런 날이 오겠소? 아이구우 부처님요, 내 언제 마당까지라도 내려갈 날이 있겠는지요. 나무관세음보살”

‘그래, 할매는 얼매나 하고 싶겠노?’

야야는 할매 생각하면 세수할 때나 머리감을 때나 “어푸어푸” 소리 내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늘 그렇게 할매 생각부터 해야 하는 것도 오늘은 심통이 난다.

‘치이, 언제까지 할매 눈치 보면서 해야겠노?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고, 성한 사람은 성한 사람이지.’

야야는 누가 뭐라고 하는 것처럼 대들듯이 중얼거리면서 새밋가로 갔다. 마중물을 한 바가지 붓고 펌프질을 한다. 다른 집에는 전기모터를 달았지만 야야네는 아직도 펌프를 쓴다. 가끔 힘들 때도 있지만 야야네 식구들은 모두 이 펌프를 좋아한다. “부욱 푸루룩” 거리더니 물줄기가 올라온다. 처음에는 미지근한 물이 나오더니 한참 잣으니 물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까지 확 퍼진다. 금방 자아 올린 물을 받아 머리를 감는다.

‘아, 시원해. 이 맛이야.’

“야야, 손톱을 세워서 문대면 머리 밑이 긁히고 상한다. 손가락 끝으로 살살 문질러야지.”

펌프질 소리를 듣고 할매가 엉덩이를 밀고 마루 끝에 나와 앉았던 모양이다.

“예에”

야야는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과 손가락 끝으로 머리를 살살 문지른다.

“아이고오, 야야. 뒤꼭지에는 물방울 하나 안 갔다. 더 수구려서 물도 더 칠하고, 아이구우 저 봐라 비누칠도 안 됐네.”

“예에.”

야야는 허리를 더 구부려 세숫대야에 머리를 박고 손바닥을 오그려 물을 떠서 뒤꼭지를 적신다. 비누도 더 칠한다.

“야아야, 뒤꼭지 거품이 그대로 있다. 한 번 더 매매 헹궈라.”

“예에에!”

슬슬 짜증이 밀려온다.

‘에이, 할마씨! 머리도 내 맘대로 못 감게 하네. 할마씨 잘 때 감는 건데.’

야야는 짜증이 왜 나는지 까닭도 모른다. 날이 갈수록 할매가 참견하고 끼어드는 게 싫어진다. 머리를 꼭 짜고 닦는데 또 입을 댄다.

“야아야, 머리를 그리 비벼서 닦으면 머리카락 다 헝클어지고 머릿결이 너무 상한다. 살살 눌러서 물기만 닦아라.”

“온데 댕기면서 닦지 말고! 집안에 머리카락이 뒹굴면 안사람들 짭짤찮다는 말 듣는다.”

“머리 감은 물은 그렇게 쏟아 내삐리지 말고 걸레라도 한 번 빨게 큰 대야에 모아 놔라. 물 많이 쓰면 저승 가서 지가 다 마셔야된다 카더라.”

할매 잔소리는 끝이 없다.

‘에이, 할마씨. 말 좀 하게 됐다고, 진짜!’

할매가 혀끝이 조금씩 풀려서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야야는 누구보다 기뻤다. 그런데 요즘 들어 할매 혀 풀리게 된 게 오히려 불편하고 짜증까지 나는 거다.

야야는 멀찌감치 작은방 앞 쪽마루에 걸터앉았다. 할매 옆에는 가기도 싫다.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아니나 다를까, 할매는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엉덩이를 밀고 작은방 쪽으로 미적미적 따라 온다.

“야야, 머리 좀 더 마르면 빗질해라. 젖었을 때 빗질 자꾸 하면 머리카락 힘도 없고 퍼석거린단다.”

“야야, 가르마를 한 자리에만 자꾸 타면 가르맛길이 꺼멓게 탄다. 한 번은 살짝 오른쪽으로 타고, 한 번은 왼쪽으로 살짝 비껴서 타고. 그래야 가르맛길이 늘 하얗게 곱다. 가르맛길이 하얗게 고우면 처자가 더 귀하게 보인다.”

야야는 그만 짜증이 치솟아 빗도 팽개치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할매 잔소리를 그치게 하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다. 속도 모르는 할매는 뒤꼭지에 대고 한마디 보탠다.

“야야, 빗 마르기 전에 한 번 씻어다 놔라. 머리빗이 깨끗해야 매끌매끌 빗질도 잘 되지.”

“예에에 예에!”

야야는 이제 그만 귀찮다는 듯 고개까지 크게 주억거리며 ‘예에에 예에’ 하고 사랑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놈의 빗 좀 더러우면 어때. 할마씨 온갖 걱정 다하고 온갖 잔소리 다하고 입을 안 대는 데가 없어.’

야야는 할매가 보이지 않게 벽 쪽으로 바짝 붙어 누웠다. 할매 안 보이는 데서 마음대로 활개 펴고 누워 낮잠이라도 한숨 자고 싶다. 아무 하는 일없이 혼자 누웠다가 우두커니 앉았다가. 그렇지만 언제 잠깐이라도 혼자 있게 해줘야 말이지. 잠깐 눈에 안 보이면 할매가 불러재끼니. 사랑방 문까지 확 닫아 버릴까 하다가 문은 그대로 열어 둔다. 방문을 닫는 순간 할매가 온 집안에 다 들리도록 염불을 외워 댈 테니까.

재떨이 당겨다가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할매 노래가 시작됐다.

‘아, 할마씨 5분도 안 된 거 같구만.’

야야는 벽 쪽으로 등을 돌렸다. 오늘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틸 생각이다.

“아이구우, 야야. 얼굴이라도 좀 내놓고 눕지. 우리 강생이 얼굴이라도 좀 보자. 나무관세음보살.”

‘아, 좀! 5분만!’

야야는 혼자 신경질을 부리며 발을 두어 번 바둥거리고 그대로 누워 버틴다. 그림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려고 하지만 이런 날은 그것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노란 은행잎이 손을 흔들어도 눈에 뵈지도 않는다.

“야아야, 자나?”

‘그래, 잡니더. 5분만 내 혼자 좀 있게 해주면 안 되냐고요.’

정말 잠이라도 들어버리고 싶어 눈을 꼭 감고 할매 말을 듣지 않으려고 용을 쓴다.

“아이구우, 잠이 보배지. 등만 붙이면 잠이 들고, 그게 보배지. 나무관세음보살.”

‘아아, 진짜. 이제 잠자는 것도 트집이야.’

정말로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 할매는?’

야야는 잠에서 깨자 튕기듯이 자리를 차고 뛰어나왔다. 혼자 있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야야도 한참이라도 할매를 보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할매는 큰방 턱도 넘지 못하고 마룻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담뱃대로 베개만 겨우 끌어다가 베고 누웠다.

‘이불도 안 덮고. 해가 있어도 요새는 한 데서 자면 선득할 긴데.’

아픈 다리를 펴지도 못하고 그대로 옹크리고 누웠는데 살이 다 빠져서 꼭 어린아이만 하다. 할매를 당겨서 허리며 다리를 쭉 펴드리다가 보니고 할매 다리가 더 가늘어졌다. 이불을 끌어다 덮으면서 가슴이 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