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이가 왔다. 아니 서인이 짐이 온 거다. 아이는 오지 않고 커다란 짐 보따리만 몇 개 왔다.무슨 짐이 이리 많을꼬. 택배비를 2만 6천원이나 줬다.
그렇게 기다리던 방학인데, 금방 달려올 줄 알았더니. 한 일주일은 걸려야 집에 올 것 같단다. 환경 동아리 미생물 모임, 영동 물꼬에도 갔다 와야 하고, 또 인문학 산책에서도 뭘 한다나? 그 사이에 하루씩 비는데 한신복 샘 댁에서 하루 쉬고, 연규네 가서 하룻밤 자고 서울에 혜숙샘한테 가서 하루 재워달라고 한단다.
아무리 걱정 말라고 해도 우리 마음은 어디 그런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덜덜덜 끌고 돌아다닐 걸 생각하면 그것도 힘들 것 같고, 이집 저집 폐 끼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일주일 넘어 여기저기 다닌다 싶으니 온갖 불안이 슬금슬금 몰려오기도 한다. 세상에 험한 소문은 얼마나 많나. 그런 우리들 염려는 안중에도 없다.
“엄마, 다 마치고 나면 우리 반 친구들 부산 갈 거거든요. 시간 되죠? 한 번에 시간이 다 안 맞아서 두 팀으로 나누어서 갈 거거든요. 밀양 연극 축제 예매 좀 부탁드려요. 그리고 8월 초에는 물꼬에 가야하고요, 그거 갔다 오면 김해 인문학 토론대회도 가야하고요. 그리고 그 다음에 또 물꼬 일주일 가야하고요. 할머니 댁에는 그 사이사이 시간 날 때 가면 되겠죠?”
아니 그럼 집에는 몇 날이나 있겠다는 거야. 방학하면 엄마하고 사찰음식도 좀 배우러 다니자더니. 기타도 좀 배우러 다닌다더니. 뭐어? 사진 배우고 싶다고 여름방학 동안만 최민식 선생님께 좀 부탁하면 안 되겠냐더니. 거실에 잔뜩 부려놓은 짐 보따리를 쳐다보면서 헛웃음이 난다. 설레면서 기다린 건 결국 집에 있는 우리들뿐이다.
하고 싶은 것 찾아서 거칠 것 없이 찾아다니는 서인이가 한편 부럽기는 하다. 내가 저만할 때는 부모님이 허락해 주지 않아서, 또 소심한 성격 탓에 어디 제대로 다니길 했나. 나중에 얼마나 아쉽고 후회스러웠던가. 늘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내 뜻도 제대로 말 못하고 딸막딸막하다가 포기해 버린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게다가 일학년 때부터 대학 입시 체제로 몰아붙이는 학교에 다닌 탓에, 어디 좋은 영화 한 편 마음대로 보러 다닐 여유가 있었나.
일반 학교에서 누렇게 뜬 얼굴로 밤늦도록 눌러 앉아 있어야 할 것이 안쓰러워서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더랬지. 주는 대로 받아먹는, 시키는 대로 끌려가는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스스로 찾아서 재미있게 공부하는 길을 찾게 되었지.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짜 맞춘, 이미 만들어진 틀 속에 갇혀 사는 삶이 제대로 사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 딸은 그렇게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서 대안을 찾았다.
에구, 그러나 걱정스러운 건 걱정스러운 거다. 아직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다니는 하룻강아지처럼 보이는 걸 어떡하나. 당차게 돌아다니는 것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심란하기도 하다.
제가 와서 제 짐 정리 해야지 뭐, 그러고 밀쳐 두었던 짐 보따리를 푼다. 팽개쳐 둔 짐을 두고 보자니 사흘쯤 되니 보면 볼수록 더 어수선하고 마음도 산란하다. 빨래, 빨래, 빨래. 생활관에서 제대로 빨아 입는다더니, 집에 올 때 되어서는 아예 모아 둔 거가? 자세히 보니 그래도 빨긴 빨았던 모양이다. 이건 무공해 세제를 써서 그렇겠다. 일단 빨래는 넘어 가고. 시원하게 구멍 뚫린 양말들. 이건 제 아버지를 꼭 닮았다. 멀쩡한 것이 꼭 엄지발가락 쪽만 구멍이 뿅뿅 나거든.
무거운 종이상자를 뜯는다. 책이다. 어디 보자 그동안 무슨 책들을 읽었나?
《경계에서 길을 묻다》《플라톤의 정의를 꿈꾸다》《시비를 던지다》《다른 십대의 탄생》《가짜 논리》《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철학과 함께 하는 50일》《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호밀밭의 파수꾼》《청소년을 위한 세계인권사》《자연스러운 건축》《신문 읽기의 혁명》《완득이》《철학 삶을 만나다》《타탕카》 《곤니찌와 일본어》《지도밖으로 행군하라》《꿈꾸는 국어수업》《무삭제판 세계사》《삼성을 생각한다》《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 그밖에 제법 많은 책을 읽었다. 제법 깊이가 있다. 관심사도 제법 넓어졌다. 세상을 보는 눈이 이만큼 깊어지고 넓어졌을까? 인문학 산책에서 다룬 책들도 있겠고, 공부시간에 선생님들이 권해준 책도 있겠지.
이 책들을 모두 이해하고 제 삶에 온전히 녹여들이진 못했다 하더라도 함께 읽고 이야기 하고 생각들을 나누면서 서인이 영혼이 더 깊어지고 넉넉해졌을 게다. 가슴이 그득해진다. 일반학교에 다녔으면 야간자율학습이니 학원이니 쫒겨다니면서 제대로 된 책 한 권 읽을 틈이 있었을까. 우리 둘레에 눈길 한 번 줄 여유가 있었을까.
비록 기다리던 딸아이는 오지 않고 마음 쓰이게 하지만, 먼저 온 책 보따리가 아이 대신 온 몸을 감싸준다. 대견함, 그리고 다행스러움, 고맙고 고마운 산마을.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책 보따리에서 쏟아져 나와서 그동안의 걱정을 한껏 덜어준다. 책을 꺼내서 책장에 꽂아주면서 자꾸자꾸 실실 웃음이 난다. 어서 보고 싶다, 우리 서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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