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권정생 선생님

강아지똥 머리말

야야선미 2016. 8. 24. 14:58

강아지똥 (세종문화사, 1974)

 

▷작가의 말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 마당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 버린 끝에, 참다 못 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니 글다운 글이 못 됩니다.
  하기야, 세상 사람치고 거지 아닌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있다면 "나 여기 있소." 하고 한 번 나서 보실까요?  아마 그런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좀 편하게 앉아서 얻어먹는 상등 거지는 있을지라도 역시 거지는 거지이기 때문입니다.
  부자의 문 밖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은, 분명히 자기는 가장 불쌍한 거지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먹고, 잘 입고 살던 부자는, 오만스럽게도 자신이 거지임을 깨달을 줄 몰랐기 때문에 영원한 불구덩이 속에서 괴로운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먹을 것을 주시고, 입을 것을 주시고, 밝고 고운 시와 노래, 재미있는 장난감까지 주신 주인이 엄연히 계신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겠다 외면해 버리고 제 잘난 척 떵떵 큰소리치는 세상입니다.
  한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들판에 아주 멋진 거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몸에는 약대 털가죽을 걸치고, 메뚜기와 산꿀을 먹으며, 바람처럼 시원하게 살았습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엔 날강도들이 떼를 지어 길 가는 나그네를 칼로 찔러 쓰러뜨리고 가진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나그네는 피를 흘리며 살려 달라고 소리질렀지만, 제사장도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 궁전에서는 임금이 가난한 백성들의 피 같은 돈을 거둬다가 진탕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들거지는 그들 제사장과 임금 앞에서 겁을 조금도 안 내고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여, 마음을 깨끗하게 씻으시오!"
   화가 난 임금은 거지를 잡아 옥에 가두었다가 목을 잘라 죽였습니다.  어리석고 못된 임금이었습니다.
  양의 가죽만 쓴, 이리 같은 가짜 제사장과 재판관과 임금들이,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엔 없어야만 될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썼기 때문에 서툴고 흠집투성이 글입니다.  어린이들에겐 지나치게 어려운 동화일지 모릅니다.  나 역시 더러운 생각을 가진 어른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내 동화를 기르시느라 가혹하리만큼 채찍질하셨던 유영희 장로님, 수백 리 산길을 타고 찾아오신 이오덕 선생님께서 쓰레기처럼 버려질 뻔한 원고들을 간추려, 책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애를 써 주셨습니다.
  너무도 불쌍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님께, 맨 먼저 이 책을 드립니다.

 

학대받는 생명에 대한 사랑
-권정생 씨의 동화에 대하여-

이오덕

  동화라면 으레 천사 같은 아이들이 나오고, 그 아이들이 꿈꾸는 무지개 같은 세계가 펼쳐지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이들에게 권정생 씨의 작품은 확실히 하나의 이변이며 충격일 것 같다. 이 동화에는 천사는 물론이고, 옷, 밥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니는 행복한 아이들도 안 나온다. 아이들보다 사람들에게 학대받는 짐승이나 곤충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도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모기라든가, 지렁이, 구렁이 파리 같은 것이다. 그리고 또, 흉악한 냄새가 나는 시궁창에 버려진 똘배, 사람들에게 뜯어 먹히는 물고기, 강아지의 동, 사냥당하는 산짐승……. 이런 미움받고, 버림당하고, 짓밟히고, 희생되는 목숨들의 얘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넥타이 매고 점잔을 빼며 살아가는 세상의 신사 숙녀들이 보면 침이라도 퇴퇴 뱉고 지나가 버릴 듯한 가련한 목숨들의 세계를 찾아가 그들을 부둥켜 안고 뜨거운 눈물과 무한한 사랑을 쏟는 것이 작가의 세계다. 이리하여 지옥의 밑바닥 같은 암흑의 셰계는 비로소 한 줄기 따뜻한 등잔불 같은 빛을 받게 된다. 일찍이 우리 아동 문학사에서 어느 작가도 그 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시궁창에 버려져 짓밟힌 목숨들의 세계가 실은 가장 인간스런 세계요, 아름다운 사랑의 세계임을 그는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사랑은 드디어 죽음이란 운명까지도 눈물겨운 부활의 의지로 이겨내는 것임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가가 보여주는 부활은 소박한 현세 부정의 속임수 같은 그것이 아니고, 삶을 긍정하는 보다 폭 넓고 깊은 신앙에서 오는 것 같다. 동화란 것이 왜 이 모양으로 슬프기만 한가. 아이들에게는 명랑한 것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유행적인 타령을 하는 사람이 응당 있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권정생 씨의 동화는 행복한 아이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불행한 아이들에게는 불행한 얘기만이 위안을 주고, 희망을 주고, 때로는 용기까지 줄 수 있다는 것, 불행한 이들에게 행복한 얘기를 들려주는 것은 그들의 불행을 더 한층 기막힌 불행으로 느끼게 하는 잔인한 짓이 된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해 괴로워하는 것이 종교요, 정치요, 문학이다. 그런데 불행한 목숨만 있는 땅에서 권정생 씨는 백 마리의 양을 다 끌어안고 구원받을 가나안을 찾아 헤매고 있다. 병들고 신음하는 목숨들만을 생각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로 그 누구보다도 건강한 인간정신과 작가정신을 가졌기 때문인 것이다.
  작가의 이런 뭇생명에 대한 사랑은 또한 그것이 결코 값싼 인도주의적인 감상에서 온 것이 아님을 말해두고 싶다. 바르고 착한 것이 항상 불의와 부저에 패배하는 현실에서, 아무리 약한 목숨이라도 결코 악에 물들지 않고, 미워할 것을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그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이 만만찮은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건전한 상황의식은 그의 많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동물이나 곤충 초목이 아닌 바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 <무명저고리와 엄마>에서는 우리 아동 문학에서는 극히 희귀하다 할 수 잇는 역사적 리얼리티를 획득한 작품으로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남쇠와 파란 눈의 아이>는 상징적 수법으로서 역사적 상황과 슬기로운 삶의 자세를 탐구한 역작이다.
  그러나 지금 권정생 씨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음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무서운 고독과 육체적 고통 속에 초인적인 노력으로 생명의 불꽃을 마지막까지 태우려고 하고 있는 중이다. 조국의 불행을 한 몸에 안은 듯한 리 작가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학대받는 가련한 생명들을 버리고 차마 혼자 떠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강아지의 똥이 환한 민들레꽃으로 다시 살아나듯, 이 땅을 위해 바친 그의 생명이 그가 사랑한 조국의 수많은 어린이들의 넋 속에 들어가 길이길 빛나게 살아 있을 것이란 것을 그 누가 의심하겠는가. 부디 이 괴로운 세상일지라도 좀더 많은 날을 살아서 더 많은 작품들을 남겨 주었으면 하고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