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재불 야야 이야기

소주 한 잔

야야선미 2017. 10. 7. 11:23

한 달에 한 동네에 시집 와서 육십 년 넘기 잘 지냈는데.”

달빛도 없는 대보름날 밤, 나란히 누운 엄마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불 안으로 손을 넣어 엄마 손을 가만히 잡는다.

젊어 바깥양반 보내고 엄한 시집 사니라 고생도 많고 애도 마이 낄있구마는, 고마 핀히 했으이 됐다.”

덤덤히 말하지만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신 동무가 맘에 걸리지, .

어제 아레만 해도 추석에는 집에 가 볼란다.’ 카더라꼬 들었는데. 추석에 볼끼다고 기다맀더마는.”

육십 년 넘도록 서로 기대고 살던 동갑내기 동무 보내는 마음을 어찌 짐작이라도 할까마는, 아무 말도 못하고 엄마 손만 꼬옥 잡는다.

이래 갈 줄 알았으면 대목 아래 한 번 더 가 볼낀데. 병실에 놔두고 나올 때 어찌나 뒤가 돌아다 비이던지, 한 번 더 가는 걸음이 안 떨어지더라꼬……

까칠하고 마디 굵은 그 억센 손이 사르르 떨린다. 끝을 맺지 못하는 그 말속에 뒤엉키는 온갖 아쉬움과 그리움들이 고스란히 내게까지 온다.

“ ‘머리가 쥐 뜯은 거 맨치로 뻗치고 허여이 못씨겠더라. 염색도 하고 빠마도 쫌 할란다 돈 좀 도고 캤더마는 대꾸 한 마디 않고 이만 원을 던지주더라. 손에 쥐어주는 것도 아이고 방바닥에다가. 그래도 그 돈 주워들고 염색하고 빠마하고 왔다. 자슥 병들어 누버 있는데, 미느리가 던지 주는 그 돈으로 빠마하고 왔다, 내가.’ 하루는 그카미 대문간에 털썩 앉더라.”

아지매 이야기를 또 하신다. 추석이라 아들며느리 손주에 증손주들까지 북적북적하던 낮에는 웃고 얘기하고 잘 지내시는 듯 하더니 잠자리에 누우니 자꾸자꾸 떠오르는 거지.

“ ‘자아 이기나 한 잔 해라.’ 카고 한 잔 따라주믄 쭉 마시고 한참 앉았다가 가디라.”

아지매가 말년에 마이 힘드셨는가베예.”

말년에만 그랬나 어데. 바깥양반이 일찍 가고 없으이 손바닥 만한 동네서 넘으 입질에 오르내릴까 싶어서 농 한 마디도 맘대로 몬하고 살았디라.”

나지막히 한숨을 쉬더니 또 얘기 하신다.

“ ‘미느리가 밭일하고 들어와 저녁 채리는 소리가 투닥투닥 쪼매이라도 시끄러브믄 내 가심이 쿵덕거린다. 그랄 때는 내가 죄인인 거 겉다, 고마. 밥 묵으민서 말도 한 마디 안 하머 또 목심 붙어있는 것도 눈치가 비인다.’ 카민서 한숨을 쏟아쌓거덩.”

떨릴락말락하는 엄마 목소리, 그런데 눈물은 내한테서 울컥한다.

그카믄 또 자아 한 잔 해라.’ 카고 한 잔 따라 주지. 그라머 쭈욱 마시고 일나서 가고.”

평생 아버지 술바라지가 지긋지긋하실 만도 한데 엄마는 애 끓이는 동무에게 그렇게 소주를 따라주곤 했던 거다.

저거 미느리도 밭일하고 집에 드가다가 내가 마당에 어실렁거리고 있으면 한번슥 들어 오디라. ‘참산마느래예, 지가 죄 받을 낌미더. 아아들 아바이 몸은 날이 갈수록 굳어가는지 몬 움직이지예. 어머이 속도 모르는 기 아인데 집에 가믄 얼굴이 안 피집미더.’ 그카고 하소연을 하디라.”

병든 남편에 나이든 시어머니에, 혼자 농사일까지 해야 하는 그 며느리의 고달픔은 오죽했을까?

그카면 또 한 잔 안 따라 주나. ‘자아 이기나 한 잔 합시더.’ 카면 미느리도 한 잔 하고 가고.”

늦도록 들일하고 지친 몸 끌고서 시어머니 동무한테 와서 소주 한 잔 받아 마시고 집에 들어가 늦은 저녁상을 차렸을 그 며느리. 또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울컥 눈물이 솟는다. 꾹꾹 누르고 있는 엄마 앞에서 어딜 감히 싶어 겨우 누지른다.

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나온 건지, 지나가던 차가 불을 켠 건지 창밖이 밝아지면서 엄마 얼굴이 언뜻 보인다.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한 손은 눈두덩을 덮고 끊어질 듯 말듯 가만가만 얘길 하신다.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엄마 손을 잡고 힘만 꼭꼭.

언제 잠이 들었을까. 아직 어두운데, 전화벨이 온 집을 깨운다.

엄마, 건너집 아지매집 미느립니더. 영구차가 이리로 출발한답니더. 아지매가 마지막 가민서 엄마 보고 싶어 할 것 같다고 미느리가 전화 했네요.”

엄마 깨우는 소리에 서둘러 일어났다. 나도 마지막 가시는 아지매를 보고 싶다. 어릴 때는 아지매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마음고생하며 사는 줄 몰랐다. 내게는 늘 허허 웃으며 다정한 얼굴로만 남아 있다.

모티이 다리껄에서 노제를 지낸답미더. 마지막 가시는 길 보실 분들은 모티이 다리껄로 나오시이소.”

잠 덜 깬 듯한 동네 이장의 목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지더니 영구차가 닿고, 십 년 가까이 병을 앓고 있는 큰아들이 내린다.

무신 빙이 사람을 저래 맨드는지. 그 장하던 사람이.”

양쪽에 부축을 받으며 겨우 내려서는 아들을 보면서 엄마는 기어코 울컥 목이 메인다. 우는 얼굴도, 아는 척 하는 얼굴도 짓지 못하는 굳은 얼굴. 저렇게 점점 사위어가는 아들을 보며 애끓이던 동무가 눈앞에 어른거린 게지. 아들 병들어 누운 것이 자기 죄인 양 며느리 앞에 죄인처럼 살던 동무가 또 생각나신 게지.

욕봤대이. 인자 훌훌 털고 피이 해라.”

동무 영정 앞에 마지막 한 잔을 따르고 엄마는 담담하게 말했다. 젊은 사람에게도 함부로 말을 놓지 못하는 엄마한테 편하게 반말하고 지낸 동무는 우리 동네서 서너 분밖에 없다.

먼저 간다고 애낄이지도 마라. 니 맘 다 안다. 먼저 가서 쉬면 우리도 금방 갈끼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담담한 듯하던 엄마 목소리가 마침내 떨리고야 만다.

여어 걱정은 다 놓고 가라. 인자 핀히 해라.”

반말로 지내던 몇 안 되는 동무, 그 마지막 동무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더니 자리 앞에 벗어놓은 신발도 제대로 찾아 신지 못한다. 막내 동생이 쫒아가 허둥대는 엄마를 부축해 나오고, 이어서 동네 다른 분들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차는 떠났다.

북적북적 들끓던 집이 이젠 조용하겠지. 명절 끝에는 물 빠진 듯 집이 더 휑할 텐데, 오늘은 아침에 동무를 보내고 가심에 더욱 바람이 들겠지.’

우리집에 와 저녁 먹고, 는개 살살 내려앉는 어두운 창문을 보다 다시 엄마 생각이 난다. 전화를 건다. 바로 위에 새언니가 받는다.

, 언니는 안 갔네. 고맙대이.”

참말이다. 오늘은 안 가고 남은 새언니가 더욱 고맙다.

너거 올키가 남아서 치우고 씰고 닦고. 인자사 다 하고 앉았다.”

언니가 고맙네예. 다 가고 휑하이 엄마 가심에 또 바람 들겠다 싶어 전화했더마는. 아지매 보낸 속이 휑할낀데.”

보낼 때는 서운하고 마음이 시리지. 그래도 인자 고마 괘안타. 우리 나이 되면 그것도 금방 아무치도 않게 된다. 때 되면 갈 곳으로 가는 기고, 인자 우리가 갈 차례다 싶거덩. 니가 생각하는 거 맨치로 가심에 바람도 안 분다. 니나 잘 자라.”

비로소 나도 편안해진다. 엄마는 또 이렇게 잔잔하게 나를 다독여주시는구나. 갈 때가 다 되어 가는 그 나이가 되면 나도 그렇게 될까.

아무도 없는 집을 뒤지니 소주 한 병이 나온다. 깊어가는 밤, 소주 한 잔 따르고 혼자 앉았으니 소주 한 잔 마시고 고개 절레절레하던 엄마가 보인다. 얼굴이 절로 찌푸려지는 이 술 한 잔을 나누며 엄마는 동무랑 속을 달래고 고달픈 세월을 견디고 사셨구나. 반말하고 지내던 동무들 떠나고 이제 엄마 옆에는 소주만……. 그래서 또 한 잔.

말간 소주잔으로 온갖 것들이 밀려와 잠긴다. 견디기 힘들어 그냥 다 놓고 싶었던 젊은 날들, 떠나간 사람들. 다시 정신 차리니 그게 무에 그리 힘들고 고통스러웠던지, 까닭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아등바등 애터지게 붙잡고 있던 것들도 이제는 웃을 수 있다는 거, 소주 한 잔 쭈욱 들이키고 토닥거릴 동무도 하나둘 보내게 될 것이고, 그래서 마지막엔 이 소주 한 잔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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