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재불 야야 이야기

할매를 불러보세요 17 - 그림처럼 곁에만 있어도 좋아

야야선미 2010. 9. 30. 17:23

그림처럼 곁에만 있어도 좋아

“야야, 해 넘어 가기 전에 어서 빨래 걷어야 되겠다.”

“예에, 나갑니더.”

야야는 숙제를 하다가 얼른 달려 나갔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해가 있었는데 어느새 어두워졌다.

“이쪽은 아직 덜 말랐어예. 내일 또 널어야 되겠어예.”

덜 마른 빨래를 골라 대충 개어 소쿠리에 담는다. 온종일 햇살이 있어도 여름하고 달리 빨래가 하루에 다 마르지 않을 때가 많다. 이렇게 겨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거, 빨래를 널 때. 호주머이를 판판하게 펴서 볕드는 쪽으로 보도록 널어야지.”

“아하아, 두꺼운 쪽이 햇볕 많이 보라고요?”

야야는 할매가 말하는 대로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반듯하게 펴고 햇볕 쪽으로 너는 시늉을 했다.

 “안감 두껍게 뭉치는 데 있제? 두꺼운 데를 잘 피고 하루 종일 해가 드는 쪽을 보게 널어야지. 솔기 쪽도 두꺼우니까 그것도 볕드는 쪽으로 보게 널고.”

할매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웃는다. 전에 보다 크게 웃지만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제법 활짝 웃으신다.

“엄마 오기 전에 마루라도 한번 문대 놓지.”

펌프를 자아 걸레를 빤다. 금방 퍼 올린 물은 손이 시리지도 않고 딱 좋다.

‘펌프는 이게 좋다니까. 겨울이라도 물이 뜨뜻하고.’

엉덩이를 치켜들고 엉금엉금 기면서 마루를 닦는데 할매가 또 나선다. 가만 보고만 있을 할매가 아니다.

“야아야, 그 쪽으로 밀면 골에 다 끼이지. 세로로 길게 닦아야 홈도 덜 나고 반들반들하게 닦이지. 그 틈에 봐라 먼지고 때고 엄청시리 끼었더라.”

‘아이고오, 우리 할매! 또 시작이다, 시작.’

야야가 움직일 때마다 눈을 떼지 않고 따라다니다가 하나만 걸리면 이 때다 하고 입을 대는 건 여전하다. 앉은 자리가 마루에서 방으로 옮겨졌을 뿐 할매한테 달라진 건 없다.

저녁을 먹고 엄마가 광주리에 씻어 놓았던 무를 들고 왔다. 야야는 얼른 일어나 마루 한 쪽에 세워 두었던 자리를 들고 와서 할매 앞에 폈다.

“행주 갖다가 닦아야지.”

“아, 할매는. 말 안 해도 할 건데예.”

행주를 깨끗이 빨아 자리를 구석구석 닦았다. 엄마가 부엌쪽문을 열고 삼베 보자기를 던져 주었다. 삼베보자기를 자리 위에 깔았다. 할매는 그 새를 못 참고 보자기를 이리저리 당겨 반반하게 편다. 이젠 한 손으로 이것저것 잘도 만진다.

엄마가 설거지를 다 마칠 동안 야야는 도마도 챙겨다 놓고 칼도 두 자루나 가져다 놓았다. 엄마 옆에서 야야도 따라 할 셈이다.

“와아, 무 잘 생겼네에. 허옇게 맨질맨질하이.”

도마 위에 무를 놓으면서 물었다.

“엄마, 오그락지 할 겁니꺼? 깍두기 담글 겁니꺼?”

“오그락지.”

오그락지 만드는 것이야 엄마가 하던 걸 본 게 있으니 가르쳐주지 않아도 할 것 같다. 채를 썰어 말리면 되지, 뭐. 무에 칼을 놓으려는데 할매가 놀래서 말린다.

“아이, 야아야야. 그리 썰면 못 쓴다. 무 오그락지도 길이를 맞춰서 썰어야된대이.”

“아, 할매는 길이 맞추는 거 되게 좋아하지예?”

웃으면서 할매를 보지만 짜증을 내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동글동글하이 썰어놓고 채 썰면 오그락지가 긴 거는 길고 짧은 거는 짧고 나중에 반찬을 해도 그렇고 지저분하고 상스러워서 안 돼.”

“흐흐, 맞다. 우리 할매는 무슨 음식이든 얌전하고 단정하게 만들어야 되지예? 상스러우면 안 되지예.”

야야가 웃어넘기면서 다시 칼을 갖다대는데 할매는 못다 한 말을 끝까지 한다.

“오그락지 길이만치 똑같이 먼저 툼벅툼벅 잘라놓고, 그걸 세워서 길이대로 채를 썰어야된대이. 한번 해 보거라, 모두다 반듯반듯 똑같이 썰어지능가 안되능가”

“하옇든 우리 할매는 반듯반듯하이, 길이는 똑같게, 음식은 얌전하고 단정하이, 그런 거 억수로 좋아하시거든. 내가 인자 모두 외운다니까예.”

그 사이 엄마가 들어와서 옆에 도마를 놓고 무를 썰기 시작한다. 엄마는 할매 말대로 먼저 똑같은 길이로 툼벅툼벅 잘랐다.

“오호홋, 엄마는 잘 하네예. 할매 맘에 꼭 들겠네예.”

“할매 말씀따라 배운 기 몇 년인데, 그럼. 집안에 어른이 계시니 이런 것도 가르쳐주시지.”

야야가 할매 말끝마다 또박또박 대꾸를 해 대는 것이 못마땅했던지 엄마가 할매 편을 들었다.

그렇긴 그랬다. 할매 말대로 썰어보니 정말로 무채의 길이가 모두 똑같다. 둥글게 썰어서 채를 썰어보면 가장자리는 아주 짧고 가운데는 길고 그랬는데. 무채를 뒤적여보면서 중얼거렸다.

‘길이가 똑같으니까 진짜로 지저분하지는 않네.’

야야가 엄마하고 그렇게 무 한 광주리를 다 썰 때까지 할매는 옆에 앉아 구경하다가 참견 좀 하다가 옆에 누워 잠이 들었다. 삼베보자기 위에 쌓인 하얀 무채가 산처럼 높다랗게 쌓였다. 칼도마를 치우고 무채는 자리에 쌓인 그대로 마루로 끌어내 펴 널었다. 방바닥을 훔치고 할매 옆에 요를 깔면서 엄마가 말했다.

“니이 사랑방에 그림 좋아하제? 그 그림이 니한테 뭘 잘해줘서 좋아하나?”

야야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림 이야기를 꺼내나 싶어 대꾸도 못하고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이불을 펴면서 말을 계속했다.

“저 그림이 니한테 아무 것도 주는 거 없이도 니가 그림만 보면 그저 기분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거맨치로, 식구가 그런 기다.”

‘아, 할매!’

야야는 저도 모르게 할매를 불렀다. 그제서야 엄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래, 할매가 옆에 있기만 해도 됩니더. 할매가 옛날처럼 곱단하게 자랑스럽지 않아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 못해주어도. 그냥 우리 옆에 앉아있기만 해도 좋습니더.’

야야는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그 말을 잠든 할매 얼굴에 대고 마구마구 쏟아내었다.

‘아, 할매예!’

할매난 부르면 절로 기분좋게 붕붕 떠오르던 날이 있었지. 야야는 정말 오랜만에 할매를 부르며 하늘을 날아오르는 가오리연처럼 붕붕 떠올랐다.

“할매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