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의 책

마음으로 만든 책 -학교 참 좋다 선생님 참 좋다/박선미, 보리

야야선미 2011. 3. 14. 15:26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 아이들 그리고 교실 일기


<개똥이네 집>에 연재했던 ‘1학년 교실 이야기’를 단행본으로 묶어 내기로 했을 때는,

‘이왕 이렇게 쭉 써온 글, 한 권으로 묶어놓아도 괜찮겠지?’

‘교실에서 아이들과 만난 세월이 얼마냐, 그 긴 세월동안 함께 살아온 이야기 한 권쯤 있는 것도 좋겠네, 뭐.’ 하고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덤빈 것 같았다.

점점 시간이 흐르고 글 뭉치를 만질 때마다 마음이 자꾸 복잡해졌다. 분명 우리 교실에서,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살던 이야기를 썼는데도 왠지 낯이 뜨겁기도 하고 살짝살짝 민망하고. 한껏 부풀려 떠벌린 것 같아 낯이 달아오르기도 하고. 글을 보면 볼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머릿속은 더 엉켰다.

‘이걸 꼭 책으로 내야하나?’

‘아이들은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고, 학교도 온 나라도 무섭게 달라지고 있는데. 책이 나올 때면 벌써 몇 해 지난 케케묵은 교실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을 텐데.’

‘이 이야기를 읽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괜한 욕심은 아닐까?’

‘이 세상에 쓰레기 뭉치 하나 더 내던져놓는 꼴은 아닌지? 간장독 뚜껑으로도 쓰지 못할 책이지 않나?’

‘두 해 넘게 이어 실었으면 되었지, 그때 읽을 만한 사람들은 웬만큼 읽었을 텐데 굳이 다시 묶어서 팔아도 되나?’

‘그래, 그만 두는 것이 맞아!’

처음 교실이야기를 쓸 때는 분명 1학년 아이들 모습을 보여주고, 우리가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싶었다. 우리 아이들이 정말 사랑스럽고 장하고 기특했지. 마음이 짠하고 코끝이 찡하기도 하고 답답하고 속이 상하기도 했지. 그런데 한 걸음 물러나와 글을 다시 보니 자꾸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나 혼자 감정에 겨워 아이들한테 지나치게 빠져있는 건 아닌가. 너무 아름답게 또 잘난 척 한 꺼풀 입혀서 내놓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글 재미있다!’

‘아이들이 어찌 그리 살아 있느냐?’

‘1학년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는 말에만 빠져 있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또, 어렵고 힘들었던 이야기보다 너무나 재미있고 아름다웠던 순간만 그린 건 아닌가. 그 무엇보다도 아이들한테 걱정스런 일이 생겼을 때 고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느냐 싶으니까 정말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한참동안 멀찌감치 팽개쳐버렸다.

‘나는 무엇 때문에 책으로 묶어 내려는가?’ ‘돈?’ 그래, 돈 생각도 조금은 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이제 정해진 벌이가 없으니 이것도 작은 도움이라도 되겠지. 그러나 이런 책이 무슨 큰돈을 벌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고작 ‘눈곱만한 돈’을 위해서 이렇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 일을 해야 할까?

또 다른 까닭이라면? ‘나 이러이러한 책 한 권 내었노라는 자랑?’ 아이들과 지낸 이야기는 드러내 놓을 때마다 자신 없고 부끄럽다. ‘아이들에게 그런 일이 있었을 때, 너는 그렇게 밖에 풀어나가지 못하느냐?’ 스스로 늘 부끄럽기 때문에. 그런 꼴에 책을 엮어 온 세상에 드러내놓고 떠벌리는 건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지 자랑할 일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면 이 책은 여기서 그만 두는 것이 옳은 건 아닐까?

곰곰 생각해보면, 처음에 글을 쓸 때는 나하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어처구니없이 큰 욕심이 있었다. 내가 아이들하고 부대끼는 동안 고민스러운 것, 사랑스러운 아이들 자랑하고 싶은 마음, 그냥 세상에 외쳐보고 싶은 것들. 그런데 이제 와서 책을 다시 묶어낸다고 읽는 이들과 얼마만큼 소통이 될까. 눈곱만큼이라도 공감할 수 있을까? 함께 나누기를 바랬지만 결국은 나 혼자만의 감상에 빠졌던 건 아닐까. 그 부분에 가면 정말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 이야기를 쓰면서 바로 내가, 그 무엇보다 고맙고 귀한 선물을 받아왔다. 아이들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참 기쁘고 즐거웠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누군가 함께 기뻐해주고 응원해 주기 전에 글을 쓰는 동안 그저 즐거워졌다. 누군가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여주든지 ‘아니야, 그렇게 푸는 건 아니야’ 고개를 가로 저을 것 같은 걱정은 나중 일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집으로 간 아이들이 다시 돌아와 눈앞에 어른거리고 곧바로 온몸을 감싸는 기분 좋은 나른함. 아이들 이야기를 쓰면서 기쁘고 즐겁고 무엇보다 내가 선생이 되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걸 한껏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해결하기 힘든 바깥 일로 마음이 울적하거나 답답할 때도 아이들 이야기를 쓸 때는 온갖 짐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즐겁고 해죽거리며 읽고 또 읽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웃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혼자서 잘 해죽거린다. 글로 써 놓은 우리 아이들이 옆으로 살짝 다가와 온몸을 간질이듯이. 글을 읽고 있으면 어느새 하나둘 걸어 나와 내 어깨에 팔을 척 걸치고 선다든지, 무릎에 척 걸터앉아 똘망똘망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듯하다.

아이들한테는 그런 힘이 있었다. 학교에서 크고 작은 온갖 일로 속이 부글부글 끓다가도 교실 문만 열고 들어서면 어느 새 잊어버리고 해닥해닥 놀 수 있었고. 학교 밖에서, 교실 밖에서 그 어떤 머리 아픈 일이 있었더라도 아이들에게 “안녀~엉!” 하는 순간 다 잊게 해 주는 힘. 그러고 보면 아이들이 살아갈 힘이었고, 기쁨이었고, 꿋꿋하게 살 수 있게 해준 버팀목이었다.

아이들 곁에서 조금 비켜나서 돌아보면 즐겁고 행복했던 일도 많았지만,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민망한 일도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모자라고 부끄러운 나를, 스무 해 넘게 비틀거리는 나를 버티게 해 준 동무들은 바로 우리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빈 교실에 앉아 하루를 돌아보며 아이들 이야기를 쓰노라면, 아이들과 엉켜 놀았던 그때 그 자리에서 아이들 마음을 돌아보고 앉아있으면, 아이들 모습이 다시 보이고 그 아이들 앞에 선 내 모습이 그대로 비춰졌다. 아니 아이들 모습은 늘 그대로인데, 그때그때 달라지는 내 모습이 오히려 더 잘 보였다. 아이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야단부터 치거나, 상처를 보듬고 아파하는 본모습은 보지 못하고 삐뚤게 날이 서서 싸우는 모습만 보고 나무랐거나. 그렇게 쓴 교실 이야기는 나를 돌아보게 하고 아이들 앞에 어떻게 서야하는지 보여주는 거울이 되었다.

아이들이 나를 꾸짖거나 나무라거나 오히려 다독여주는 따뜻한 동무였다면, 글쓰기는 나를 철들게 하고 아이들을 제대로 바르게 보게 해 주었다. 그리고 모자라고 서툴지만 서로 어루만져주고 다독여 주며 함께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준 장한 힘이었다.

아이들과 글쓰기를 함께 하고 삶을 나누고 온몸과 온마음으로 부대끼고, 다 드러내놓고 기대면서 살아온 우리들 교실이야기. 오랫동안 고민하느라 했지만, 결국은 우리들 이야기에서 마음이 머문다. ‘세상에 내놓고 걱정도 들어보고, 꾸지람도 들어보지 뭐!’ 하고.

마지막까지 고민을 하는 내게 편집일을 맡았던 선생님이 해 준 말도 힘이 되었다. 학교에 갓 들어간 우리 아이가 밥은 잘 먹는지, 동무들과는 잘 어울리는지, 공부는 잘 따라하는지, 학교는 어떤지, 선생님은 무서워하지 않고 잘 따를지. 학부모들은 걱정도 많을 텐데, 그런 막연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줄 수 있는 책이 되지 않겠느냐는. (개똥이네집, 2011.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