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온다.
길 가는 사람들 모두 목은 없고 하얀 입김만 물고 걷는다.
참 드문 추위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바람 또한 매섭다.
산꼭대기, 둘레에 높은 건물 하나 없는 이 학교 운동장은 언제나 바람이 세다.
오늘은 시퍼런 날을 갈 듯 코 끝에 스치는 바람에 살갗이 아리기까지 하다.
밤새 바람이 비질하듯 지나갔을 운동장이 말끔하다.
딩구는 가랑잎 하나, 흙먼지 하나 날리지 않는 운동장은 말끔하다 못해 차라리 얼어붙은 듯 하다.
옷깃을 싸 잡고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아직 햇살도 안 들어오는 복도는 싸늘한 냉기가 가득하다.
교실엔 좀 나을까 문을 열고 뛰어든다.
"어어어 선생님!"
창우가 발딱 일어서며 반긴다. 반가운 건지 놀래서 소리친 건지.
"창우야, 와 이래 일찍 왔노? 억수로 추운데."
"쌤, 근데요 내가 1등이예요."
짜슥, 1등 온 게 뭐 대수라고 자랑질은.
"아 아니네. 새벽돌봄반 빼고요."
가방에서 돋보기 꺼내고, 사물함에 가방 가져다 넣고, 목도리 풀고 장갑 빼고 호주머니에서 휴대폰 꺼내고......
그러든 말든 창우는 옆에 찰싹 달라붙어 종알거린다.
'새벽돌봄반? 하긴 해가 늦게 뜨는 이런 겨울 아침, 얼라들한테는 새벽 맞지.'
난방기를 켜고 컴퓨터를 켜면서 자리에 앉으니 아예 옆에 있는 작은 의자를 끌어다 바싹 붙어 앉는다.
"쌤, 내 왜 이렇게 일찍 왔는지 알아요?"
"그니까, 아까 내가 물었잖아. 날도 추운데 엄청 일찍 왔네."
"똥 눌라고요. 아, 진짜. 우리 집에 물이 다 얼었잖아요. 그저께 부터 물도 안 나오고요. 화장실 물도 안 나와요."
물이 얼어?
그래, 맞다. 겨울에는 물이 얼고 보일러도 얼어터지기도 하지.
십오륙년 전만 해도 우리도 그런 집에 살았지.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를 녹인다고 불을 지폈다가 고무호스가 다 녹은 일도 있었지.
아파트에 살기 시작하면서 아주 남의 일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저께부터 물이 안 나온다고?"
"예, 쌤 근데요 히히 나 그저께부터 세수 안 했어요. 히히"
"뭐시라? 세수 안 했다고? 근데 나는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쪼매 꼬질하네."
"어제는 몰랐죠?"
"응, 미안. 그런 줄도 모르고. 집에 물이 안 나와서 엄청 불편하겠네. 밥은?"
"전기밥통에 밥 마이 있거든요. 김치하고 먹으면 돼요."
창우는 아빠하고 둘이만 산다.
전기밥솥에 밥 한 솥 해 놓고 김치 한 가지 놓고 며칠씩 먹을 걸 생각하니 짠하기만 하다.
"아참, 똥은 눴나?"
창우뿐 아니라 나도 이야기가 이리 저리 왔다리갔다리. 맥락도 없다.
"예. 새벽부터 똥 누고 싶었는데요. 꾹 참았어요."
"유진이 집에 좀 가서 누지."
"아빠가 유진이 집에 가라고 했거든요. 근데 아침부터 갈라니까 쫌 그래서요. 어제 아침에도 갔거든요."
가슴 한 가운데가 쩌릿해 온다.
앞집 동무집에 아침부터 똥 누러 가면서 얼마나 쭈빗거렸을까.
없는 사정은 없는 사람이 알아준다고, 그래도 이웃에 유진이네가 살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세수 안 했으면 이도 못 닦았겠네?"
"냄새 나요?"
"쪼꼼."
손톱으로 앞니를 긁어 코앞으로 가져가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얌마!"
"냄새 마이 나는가 싶어서요. 히히"
"내 칫솔 한 번 끓여서 줄테니까 이걸로라도 좀 닦을래?"
"칫솔 있어요?"
"응. 쓰던 건데 삶으면 괜찮겠제? 개학할 때 사 온 거라서 어제 점심 때 한 번 밖에 안 썼다."
"뭐어, 괜찮아요."
전기주전자에 물을 붓고 내 칫솔을 넣었다.
물이 끓을 동안 둘이서 전기주전자만 보고 있다. 잠깐 조용하다.
"옛날에 내 어릴 때는 손가락에 소금 찍어서 이 닦았거든. 잘못해서 삼키면 억수로 짭대이."
"우리 아빠도 소금으로 이 닦을 때 많아요."
딸깍, 물이 끓었는지 불이 꺼진다.
좀더 오래 끓이고 싶은데, 이놈은 저쯤에서 절로 꺼져 버린다.
억지로 단추를 눌러서 더 끓인다. 단추를 누른 채 또 둘이서 물이 부글부글 끓는 주전자만 바라본다.
"쌤, 그거 억지로 누르면 고장날 걸요? 우리 집에서 전에 라면 끓여 먹다가 고장났잖아요. 아빠한테 맞아 죽을뻔 했잖아요."
"됐다. 자."
치약을 꾹 짜더니 화장실로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제대로 닦긴 닦았는지 또 번개같이 달려온다.
"여깄어요, 칫솔요."
"집에 니 칫솔 있나? 니 할래?"
"내꺼 있어요. 어린이용 있어요."
"그래? 그럼, 줘. 나도 점심 때마다 닦아야 되니까."
"내가 닦은 건데 괜찮아요?"
"니도 내 닦던 걸로 했다 아이가?"
이 녀석 지 자리로 갈 생각을 않는다. 이제 나도 내 볼 일 좀 보고 싶은데.
"인자 자리에 가서 앉지?"
"쌤, 내 세수도 하고 올까요?"
"찜찜하제? 근데 물이 억수로 찹던데?"
"괜찮아요."
아주 씩씩하게 문을 열고 나선다.
'아, 그렇지.'
"창우야, 잠깐만! 뜨신 물 만들어 주께"
전기주전자에 물을 가득 넣고 끓인다.
"가자. 이거 쏟으면 큰일이다. 내가 들고 가께."
창우를 앞세우고 화장실로 간다.
"찬물 받아라. 뜨거운 물 타 주께."
손등이 잠길락말락 받더니 꼭지를 잠근다.
"뜨신 물요"
"더 받지?"
"이거만 받으면 돼요. 나중에 또 헹굴 거잖아요."
"너무 안 작나?"
"우리 아빠가요. 물 너무 많이 쓰면 안 된대요. 물 많이 버리면요, 지옥가서 자기가 다 마신대요."
물 아껴야한다는 말, 지당하고 지당한 말씀인데도 울컥 치솟는 게 있다.
비누칠을 해서 얼굴을 문지르더니 눈을 감은 채 또 쫑알거린다.
"쌤. 머리도 감으까요?"
"물이 모자라는데"
"조금씩 쓰면 돼요."
"그럼, 여기 두고 갈테니까 천천히 하고 있어라. 1반 쌤 거 가지고 물 한번 더 끓이께."
조그만 전기주전자 두 개 가지고 세수하고 머리 감고, 그런데도 더운 물이 조금 남았다.
아끼는 것이 몸에 밴 아이다.
전기주전자랑 비누통을 챙기는데 창우가 또 쫑알쫑알.
"쌤, 머리 감으니까요 목욕하고 싶어요. 목욕하면 진짜 좋을 것 같아요."
'진짜 그렇겠다. 저녁에 임마 데리고 찜질방에나 갈까?'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또 쫑알.
"쌤, 뜨신 물 남았죠? 아, 진짜 아깝다. 그죠? 금방 식어버릴 건데."
우리 창우, 오늘 임마한테 많이 배운다.
'야야가 만나는 아이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아이들은 또 처음이다 (0) | 2012.04.13 |
---|---|
유민이의 결심 (0) | 2012.03.06 |
<재영이 기와집> (0) | 2011.11.17 |
<그냥 좀 놔두지> (0) | 2011.11.17 |
속풀이 (0) | 2011.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