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이는 산마을에 산다

산마을고등학교 이야기 "아주 야무진 결심"

야야선미 2011. 12. 26. 18:22

"엄마 방학 동안에 이 책상 제가 쓸게요.”

겨울방학 짐을 풀다가 앉은뱅이책상을 거실 가운데로 끌어다 놓는다. 종이상자를 풀어 책을 꺼내서 앉은뱅이책상 위에다 가지런히 챙긴다. 책이 꽤 많다.

“이거 방학 동안에 읽을 책들이에요. 문제집도 풀어야 되고.”

“오호. 결심이 야무진데?”

"근데 일학기때 읽던 책도 있네?"

"예, 제대로 못 읽은 거 한 번 더 읽어야되고요. 읽은 거라도 잘 모르겠는 거 한번 더 보고요."

"하긴 한 번 읽어도 또 읽고 또 읽을 책이 있긴 하지. 근데 이걸 다 한다고?"

“할 일이 쫌 많아요.”

“잘 됐네. 이번 방학에는 우리 딸 덕에 나도 한번 지대로 알차게 보내볼까?”

“큭큭, 지대로 알차게. 좋아요. 아, 근데 농담 아니고 이거 방학 동안에 다 풀고, 책도 다 읽어야 해요.”

얼핏 보아도 그건 좀 무리인 것 같은데. 어찌 되었건 저 결심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지.

다음날, 아주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그래, 방학 첫날인데 뭐. 첫날은 조금 여유를 보이는 센스!”

둘 다 평화롭게 농담을 하면서 아주 아주 늦은 아침을 먹고 어깨를 비비고 앉았다. 늘 혼자 있다가, 이 얼마나 사람다운 아침을 먹고, 이 얼마나 사람답게 차를 마시느냐. 둘이서 시덥잖은 농을 주고받으면 시간은 흘러흘러 오후 서너시.

 

 

   

 

바로 앞에 놓인 앉은뱅이책상. 그리고 그 위에 가지런한 책들이 눈총을 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그 눈총이 강렬하다.

“아아, 문제 풀어야 하는데.”

“아아, 저 책들 읽어야 하는데.”

문제집을 뒤적거리더니 비명을 지른다.

“엄마, 이거 이거 하루에 석 장씩은 꼬박꼬박 풀어야 방학 동안에 끝낼 수 있어요. 헐”

“하루 석장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거 되게 어렵거든요. 그리고 저 책들도 읽어야 되는데.”

“아아, 영어 공부도 해야 하는데.”

“숙제야?”

“그건 아니지만. 방학 동안에 다 읽어야 돼요. 2학년 되면 또 다른 거 읽을 것들이 생길 텐데.”

“길고 긴 방학, 이제 시작인데 뭐.”

안달하는 딸아이 옆에서 나까지 덩달아 볶을 수는 없지. 아주 너그럽게 말해주고 둘이 또 찬 한잔씩 들고 어깨를 기대고 앉았다.

"흐음, 역시 우리 공주가 내려주는 커피가 역시 더 향기롭고 맛있어. 내 손으로 내린 건 이 맛이 안나."

"그렇게 안 붕붕 띄워 줘도 방학동안에는 제가 커피 내려드릴 게요. 그거 뭐 어렵나?"

동무들 이야기, 영화 이야기, 책 이야기, 공연 이야기. 이 얼마나 사랑스런 시간이냐. 공부고 책이고 다 괜찮다. 오늘 아니면 내일 좀 낫게 하지 뭐. 오랜만에 딸아이와 함께 느긋하게 앉은 이 시간이 너무나 좋아. 흐흠, 따끈한 커피 잔이 손으로 코로 입으로 온몸에 행복을 가득 실어다 준다.

오늘 하루 늘어지게 행복하게 보내고, 내일부터 둘이 나란히 앉아 책도 읽고, 공부도 하지 뭐. 그리고 그동안 못 해 먹인 거 좀 해 먹이고. 그동안 못한 이야기 좀 하고. 엄마 노릇도 딸 노릇도 천천히 실컷 하지 뭐. 둘이 마주 보고 끄덕거린다. 이럴 때는 쿵짝이 잘 맞아. 그리고 곁눈으로 책상을 보다가 둘이 눈이 딱 마주쳤다. 크큭. 둘 다 저 것들 무시하지 못하는 이 소심하고 어설픈 깐깐함. 모녀지간 아니랄까 봐.

아, 어쨌든. 겨울방학은 시작되었다. 딸아이랑 실컷 비비고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해질녘마다 남편이 일찍 올까 안 올까, 아들이 저녁 먹고 올까 안 올까 전화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도 사람답게 한 달을 살 수 있다는 거지.

그러나 저러나 서인이는 저 많은 책과 문제집을 정말 다 해낼 수 있다고 믿을까. 저런 무지막지한 결심을 하다니. 참 무모하고 야무지다. 방학 동안에 스스로 달달 볶진 말아야할 텐데. 그렇다고 너무 무심하면 내가 또 살살 애를 피울지도 몰라. 아, 가쓰나! 괜한 숙제를 벌려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