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 짐 보따리는 참 오래도 간다. 집에 온 지가 언젠데 큰 가방 하나는 그대로 있다. 1학기 때는 여기저기 전에 쓰던 자리에 차곡차곡 챙겨 놓더니, 이번엔 아예 보따리를 풀 생각도 않는다. 이대로 쓰다가 개학하면 그대로 가져간다나? 겨우 두 번째 맞는 방학인데 벌써 짐 꾸리는 것이 지겹단다.
서인이 짐 속에서 나온 반짇고리. 흐흐 그래도 여학생이라고 반짇고리도 있단 말이지.
"공주, 이건 주로 어디 써? 양말 기워 신나?"
뻔한 걸 묻는다. 집에 함께 있을 때야 늘 챙겨주는 대로 신다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양말도 기워서 신고, 뜯어진 치맛단이며 옷가지도 꿰매 입구나 싶으니 어찌나 기특한지. 자꾸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씹힌다.
“실도 색색깔로 다 있고오, 바늘쌈지도 있고오, 오오 제법인데.”
"뭐어, 양말도 깁고. 되살림 바느질도 하고. 면 생리대도 만들고. 할 거 많아요."
옆에서 휴대폰으로 카톡을 하는지 게임을 하는지 아주 덤덤하게 말하는데, 나는 너무나 벅차다.
"아니, 우리 딸이 바느질을 그렇게 잘한다고?"
"아니. 잘 하는 건 아니고요. 양말은 발가락 나오니까 할 수 없이 기워서 신어야 되잖아요. 엄마 근데 난 왜 그렇게 양말 구멍이 잘 나는지 모르겠어요. 엄지발가락 쪽에만 맨날 구멍이 나요."
"그거 아버지 닮았는 갑다. 아버지 양말도 그렇거든. 면 생리대는 만들기 어려울 건데."
"본이 있으니까 본 대로 하면 돼요. 어머니들이 한 것처럼 반듯하게는 안 되지만 그런대로 만들 순 있어요. 우리 그거 축제 때 팔았잖아요."
“맞다. 뽀송해서 애들이랑 면 생리대 만들어 판다고 했제?”
‘뽀송해서’ 보리, 송아, 해인이, 서인이. 네 사람 이름 앞자리를 따서 만든 이름이란다. 면 생리대 만드는 모임의 이름. 이름도 참 잘 짓는다. 보리 송아 해인이 서인이 그 네 사람 '뽀송해서'가 만드는 뽀송뽀송한 면 생리대.
‘뽀송뽀송한 면 생리대, 그것도 제 손으로 만들고. 아이고 이뿐 것들.’
생각할수록 대견하고 자랑스러운데, 정작 서인이는 그게 뭐 별 일이냐는 듯. 내 가슴이 얼마나 벌렁거리는지 저 녀석은 알 수 없어. 반짇고리에 가지런히 놓인 알록달록한 실을 꺼내보고 바늘쌈지를 열어보고 이것저것 만지작거린다.
'아, 우리 딸이 이러코롬 컸단 말이지. 아, 그리고 요새 고등학생들 중에 제 손으로 양말 기워 신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겠노. 면 생리대 만드는 아이들이 있기나 있을라고.'
"공주, 이 똑딱이 단추는 왜 이래 많아? 이건 어디다 써?"
"면 생리대에 다는 거예요."
"되살림 바느질은 주로 뭐해?"
"짜투리 천으로 인형 만들어요. 지원이 언니한테 배워요. 언니 진짜 인형 잘 만들거든요."
"되살림 바느질. 말만 들어도 참 좋네."
"지금은 인형만 만드는데 내년에는 좀 더 많은 거 만들어보자고 했어요. 제대로 배우면 좋은데. 알아보고 있어요."
아, 잠깐 아찔하다. 저 아이가 남들처럼 일반 학교를 가서 수학책, 영어책만 끼고 앉아 달달 외우고 있었다면? 앞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발등에 떨어진 시험에 연연하며 학교며 학원이며 죽어라 쫒아다니게 했더라면.
사실 저 만한 나이에는 누구나 기운차고 생기있을 때지. 뭐 든 해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서슴치 않고 달려들어 보고 싶을 때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 부시시한 채 학교로 나가서 다시 그 다음날 새벽녘에나 잠든다는 고등학생들. 지칠 대로 지친 그 아이들이 무슨 힘이 남아 꿈을 꾸고 세상 이야기를 하고 둘레를 돌아보겠는가. 심하게 말하면 한창 기운 뻗칠 나이의 그 아이들을 일찌감치 거세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제 본성은 아랑곳 없이 이미 꽉 짜맞추어진 세상으로 기를 쓰고 집어넣으려는 어른들의 욕심이 아이들을 그렇게 거세하고 있는 셈이다.
자기 스스로 꾸리는 삶은 꿈도 꾸지 못하고 이리 저리 끌려다니다가,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분노로 나타나는 것일 거다. 그러나 이미 거세당한 아이들은 그 분노를 달리 표현할 수도 없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 제 둘레에 있는 약한 상대를 골라 괴롭히는 거다.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심각한 학교폭력은 어릴 때부터 제 삶을 모두 빼앗겨 꼭두각시처럼 살고 있는 저 아이들의 아우성이다.
제가 제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보지 못한 아이들. 제 손발 꼼지락거려 만들어보고 이루어보는 기쁨도 맛보지 못한 아이들. 봄에 돋아나는 여린 풀잎 하나 볼 여유도 없는 아이들. 계절이 바뀌는지 자연은 어떻게 시시때때로 달라지며 감동을 주는지 저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먼 남의 이야기일 뿐이지. 그런 아이들을 두고 왜 요즘 아이들은 동무의 아픔도 모르고 이웃의 슬픔 따윈 모르는 거냐고 나무랄 수 있을까. 왜 요즘 아이들은 다른 사람을따윈 배려할 줄도 모르고 자기 밖에 모르느냐고 탁할 수 있느냐 말이지.
“아, 참. 이 거 엄마 선물. 내가 처음으로 만든 인형이예요.”
반짇고리 하나 앞에 두고 너무 많이 나갔나? 잠깐 딴 생각에 빠졌는데 서인이가 아주 작은 인형 하나를 꺼내 준다. 바느질이 아직 엉성하긴 하지만 참 특별하게 생긴 놈이다.
“오오오! 멋진데. 우리 공주 보고 싶을 때마다 보면 되겠다.”
“그 정도는 아닌데.”
참 덤덤한 녀석. 나이 열일곱. 할머니들이 자주 하는 말처럼, 옛날 같으면 시집을 갈 나이다. 그러니 제 양말 기워 신고, 제가 쓸 물건 만들어 쓰는 것쯤은 마땅히 할 수 있어야지. 그런데 이렇게 가슴이 벌렁거릴 만큼 대견하고 기특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니. 요즘 아이들은 온갖 것 다 누리고 편안하게 자라는 것 같지만 어찌 보면 반쪽이 그러니까 심하게 말하면 반은 병신으로 길러지고 있다. 지금 우리 교육이 그렇다.
반짇고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또 깊이 숨을 들이쉰다.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다.
‘그래, 남들 말하는 일류 대학이 뭐 대수냐. 저렇게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손가락 발가락 하나 얄랑거리지 않고 머리만 굴려 살게하는 그런 반병신 만드는 교육이라면 그깟 것 안 해도 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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