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할 때 세웠던 원대하고 야무진 계획을 제대로 지킬 수 있나, 뭐. 그래 처음부터 살짝 무리한 욕심이었지. 그래도 방학 내내 책상 내려다보면서 저거 저거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하고 마음을 쓰긴 하더라만.
처음에 가지런하던 그 책상이 이게 이게 이런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게 책상인지 안 쓰는 물건 쌓아두는 곳인지.
문제집 달랑 서너 장 풀고, 책 두어 권 들었다 놨다 하면서 방학을 다 보냈지만 그래도 아주 즐거웠으니 됐지. 방학 동안 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늘어지게 게으름피우고. 그 덕인지 훨씬 안정되고 얼굴도 환해진 것 같다.
기숙사 생활이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가 하나도 없어도 아이들 나름대로 힘들고 어려운 점이 없지 않을 거다. 서인이는 특히나 집에서 멀어 자주 나올 수도 없으니 마음속에 쌓인 자잘한 찌꺼기들이 묵어서 그것이 다른 곳으로 튈 수도 있지.
어떤 뚜렷하고 큰 문제가 아니라도 학교든 어른들 세계든 지극히 소소한 일로 속상하거나 섭섭해질 수도 있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 그리고 조금 부딪힐 일이 있거나 새뜩할 일이 있었더라도, 집에 가서 식구들이랑 지내다가 하룻밤 자고 나면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면서 만날 수도 있는 게 또 사람이다. 사실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아주 작은 일로도 서운했다가 또 어줍잖게 풀렸다가 그러면서 사는 거지. 그리고 시간을 두고 혼자 한 발짝 떨어져있으면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게도 되고, 좀 객관으로 보게도 되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이해하거나 저절로 풀리거나.
그런데 생활관에서 함께 지내는 이 아이들은 아침부터 잘 때까지 다함께 있어야하니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동무나 선생님, 학교에서 겪는 여러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들에 대해 객관으로 볼 여유도 없다. 그 속에 쭉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니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 그러니 한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풀리지 않고 자꾸 속으로 끙끙대면서 감정이 점점 더 상할 수도 있어. 성격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나겠지만, 서인이는 그런 면에서 혼자 다스리느라고 많이 힘들었을 거다.
주말에라도 집에 가서 동무들도 학교 일도 좀 멀리감치 두고 제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을텐데. 식구들하고 어리광도 부리고 속엣 것 털어놓고 이야기도 나누고 짜증도 좀 내면서 조금씩 잊어버리거나 엷어지도록 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맴맴 맴돌다 보니 가슴속에 엉킨 답답한 실타래가 더 엉켜가는 듯 했을 테지.
그동안 학교 공부 방식이 어떻다느니, 대학을 가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느냐 공부하려고 해도 딱히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진학에 불리하다느니 하는 투정섞인 불안감도 어떻게 보면 혼자서 자꾸 그 생각에만 빠져있다보니 더 심각해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방학이 필요한 거다. 아이들 마음의 묵직한 것들 모두 내려놓고 쉬는 시간. 그 고민과 온갖 가지 생각들을 겪으면서 좀 더 깊어지고 단단해 지는 거지. 그러면서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거다.
방학동안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흐트러져가는 책상을 내버려두고 보고만 있었던 것도 스스로를 놓고 좀 쉬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도 끝내 다 내려놓지 못하고 틈틈이 "아, 책" "아, 저 문제집!" 할 때마다 아주 포기하는 놈은 아니겠다 싶어 미덥기도 하고, 끝끝내 놓지 못하는 저 부담감이 애잔하기도 하다.
아, 이제 또 이 편안한 집을 떠나 학교로, 생활관으로 옮겨가서 지낼 날이 돌아왔다. 그래도 한 달 푹 쉬고 가니 한동안은 아주 편안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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