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앞에 서면/ 박노해
아이 앞에 서면
막막한 사막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당신은 제게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전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없네요
대숲을 흔드는 바람이 불고
은하수가 흐르는 밤이 오면
오래된 꿈과 전설과 사람의 도리와
유장한 강물 같은 이야기가
제 안으로 시리게 흘러들어
때로 내 작은 가슴이 눈물로 범람하고
거기 비옥한 토양이 첩첩으로 축적되어
오늘의 내가 되어 아이 앞에 섰지만
저는 내 아이의 가슴을 넘치게 할
살아 있는 강물 같은 이야기가 없고
들려줄 삶다운 삶의 이야기가 없어
가슴 속의 옥토 하나 만들어주지 못하네요
저는 내 아이 가슴을 TV와 학교와
과외와 인터넷에 떠맡긴 채
하루하루 사막으로 만들어가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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