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선물이예요.”
혜선이가 동그랗게 싼 걸 내민다.
“오잉, 선물?”
“거울이예요. 엄청 예뻐요.”
애경이가 옆에서 거든다.
“나도 샀는데, 이거 야야꺼에요.”
수진이가 꼭지에 하얀 동물 머리가 커다랗게 붙은 걸 쓰윽 내민다. 가만 보니 볼펜이다. 사자인지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헉! 이거 사자가? 멋있다. 근데 너거들 맛있는 거 사 묵지. 선물은 말라꼬 샀노?”
“별이도 샀는데, 별이는 열쇠 고리 샀어요.”
별이랑 친한 주란이다.
“그러니까, 너거들 맛있는 거 사 묵고, 너거들 사고 싶은 거나 사지. 내꺼는 말라꼬 샀노?”
“우리 것도 샀어요. 엄마가 용돈 많이 줬어요.”
왈칵! 눈가가 뜨거워진다. 수녀님들이 아이들 놀러 간다고 얼마씩 용돈을 주셨을 거다. 그 용돈이 얼마나 된다고. 그리고, 요즘 아이들이 저거들 놀러 갔다 왔다고 선생한테 선물 사다 주는 아이들이 어디 흔하냐고. 정이 그리울 거라고 그래서 정을 많이 줘야겠다고 생각만 하는 나보다, 이 아이들이 훨씬 정을 더 많이 준다.
지지난 일요일 저녁, 밤에 자려고 누웠다가 머리를 치면서 날 탓했다.
‘아이참, 왜 그 생각이 안 났노? 아이들 용돈을 좀 줬어야 되는데.’
7일, 8일. 남학생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에버랜드를 갔다. 그 전날 까지는 생각했다. ‘아이들 갈 때 용돈 좀 줘야지.’ 하고. 그런데 이렇게 깜빡 잊다니. 벌써 이럴 나이는 아닌데, 에휴우.
그땐 깜빡 잊어서 그랬다지만, 그저께 월요일 여학생들이 에버랜드 가는 날. 그날은 용돈 생각이 났지만 또 안 주고 보냈다.
‘남학생들 갈 때는 주지도 못했는데. 여학생들만 주면 남학생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날낀데.’
‘그래그래 그 난리를 우예 감당하노. 담에 뭐 기회가 있겠지?’
그렇게 고딴 생각만 하다가 여학생들도 그냥 보냈다. 여학생 용돈 줘서 보내고, 남학생들이랑은 과자라도 좀 사서 나눠먹고 놀았어도 될 걸.
‘너거들 아무 탈없이 재미있게 잘 놀고 와서 고마워.’ 하면서 맛있는 거 나눠먹고 한 두어 시간 놀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노. 사실 그땐 월급날 밑이라 돈이 좀 궁하긴 했지만.
어쨌든 난 그렇게 몇 만원 되지 않는 돈 땜에 머리만 굴리면서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는데, 부끄럽게도 아이들은 몇 푼 안 되는 용돈으로 내 선물을 사 가지고 왔다. 저거들 받는 용돈이 얼마나 된다고.
동그란 손거울, 열쇠고리, 볼펜, 머리핀, 책, 꽃장식… 아기자기 꼬물꼬물 어여쁜 선물들이 책상 위에서 빤히 올려다본다. 난 고것들을 차마 보지도 못하고 눈길을 피하는데 자꾸자꾸 빤히 쳐다본다.
아침 이야기 시간. 오늘은 인혜 차례다. 에버랜드에서 물놀이 한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이 깔깔거리고 웃는다. 모두들 함께 가서 신나게 놀고 온 터라 어느 때 보다 열심히 듣는다. 그렇지만 한번 미안하고 부끄러워진 내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고 자꾸 젖은 웃음만 나온다. 인혜 이야기가 끝이 났지만 교실은 한동안 재잘재잘 조잘조잘. 얼마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노? 그래 한참 놀아라. 그렇지만 그것도 오래 못 참고 나선다. 이게 내다. 아이고 꼬라지 하고는.
“자아 그만그만, 너거들만 얘기하니까 난 너무너무너무 궁금하거든.”
“여러분이 놀고 온 거 좀 듣고 싶은데. 한꺼번에 다 들을 수도 없고. 아아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오오?”
“글 쓰라고 할 거죠?”
대뜸 던지는 저 말! 머리 잘 돌아가는 세윤이다.
“헉! 들켰다. 그래 글 좀 쓰면 안 되까? 농담 아니고, 남학생들도 지난주에 갔다 오고, 여학생들도 갔다 오고. 그저께 수현이가 에버랜드 이야기 하고 오늘은 인혜가 이야기하고. 난 진짜 궁금해 죽겠거덩.”
여전히 저거들 끼리 히죽히죽 수군거리면서 내 얘길 듣긴 듣는다. ‘에이 됐어요. 귀찮아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단 말이지. 고마워라.
“여러분이 어떻게 놀았는지, 뭐가 재미있었는지, 진짜로 재미있었는지, 별로 재미없고 힘만 들었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는지. 지인짜로 궁금해. 에버랜드에 가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신나게 놀았는지 막 소리 지르고 신나게 놀았는지. 그걸 들려주듯이 쓰면 안 되까?”
신나게 놀고 온 덕분인가? ‘에이 싫어요’ 하지 않는다. 또또상자에서 이면지를 꺼내 세고 있는데 불쑥 들리는 말. 찬수다.
“샘도 그럼 써 주세요.”
“응? 뭘?”
“지난번에 재언이랑 재성이랑 쟤들 샘 집에 가서 잤잖아요. 그때 뭐했는지 엄청 궁금하단 말이에요.”
“맞아요. 궁금하단 말이에요.”
“우리도 엄청 궁금하니까 샘도 자세히 눈에 보이는 거처럼 써 주세요.”
“맞아요. 아이들이 뭐했는지, 집에서 뭐하고 놀았는지 잘 때는 어떻게 했는지 보이는 것처럼 말하는 것처럼 써주세요.”
아, 깜짝이야. 놀라워라. 아이들이 내가 하던 말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니. 맨날맨날 안 듣고 딴 짓만 하는 것 같더니 이렇게 베끼듯 말한다. 고맙지. 그리고 또! 아이들이 우리 집에 갔다 온 지 보름이나 돼 가는데, 이때까지 그걸 묻지도 않고 있다가 지금 이렇게 말이 나오니까 조렇게 쏟아진다. 어떻게 참고 있었을까? 아님 물어보지도 못할 만큼 뭔가가 있었나? 그래 그 이야길 하긴 해야겠구나. 사실 아이들 모두를 한꺼번에 데리고 가질 못해 몇몇씩 데리고 가기로 마음 먹었는데. 가지 못한 아이들은 얼마나 궁금할까. 또 얼마나 갈 날을 기대하고 있을까.
“흐흐 난 요즘 일기 못 썼는데. 시험 문제 내고, 시험 치고, 방학 하기 전에 성적표 만들고 엄청 바빠서”
사실은 오늘도 요녀석들 조용히 글 쓰고 있으면 밀린 일 좀 할까 하는 속셈도 있었는데. 새로 살 도서목록을 빨리 마무리해서 결재 맡아야 하는데. 방학 전에 결재 맡아야지 새 책이 들어오고 아이들 방학 때 새 책 많이 읽으라 얘기 할 수도 있는데. 마음은 바쁜데 일은 늘 밀린다.
“바쁘다고 안 쓰면 자꾸자꾸 멀어진다고 했잖아요. 지금 우리 쓸 때 샘도 쓰면 되잖아요.”
“아으윽 우짜노? 난 지금 꼭 해야 되는 일이 있는데. 그 대신 오늘 밤에 가서 써서 내일 발표하면 안 되까?”
“알았어요.”
“약속 지켜야 돼요.”
오늘 보니 이 녀석들이 훨씬 너그럽다. 나 같았으면 말을 냈으면 어떻게든 써 보라 늘어졌을 텐데. 오늘도 어떻게든 아이들한테 이렇게 글을 쓰라고 하질 않나. 할 얘기가 많아서 그럴까. 아이들이 여느 때 없이 조용히 글을 쓴다.
조용한 틈을 타서 일을 한다고 목록 뽑아 정리하던 것을 열었는데 일이 되질 않는다. 고개 숙이고, 책상에 털퍼덕 엎드려서, 머리 푹 처박고 가지각색으로 글을 쓰는 저 아이들이 자꾸 눈에 들어와서. 그리고 자꾸 실실 웃음이 나서. 글 쓸 때마다 했던 그 말을 기억하고 내한테 그렇게 쓰라고 주문하는 저 녀석들이 고맙고 대견해서. 도서목록이고 뭐고 그냥 덮어놓고 턱 고이고 앉아 아이들만 본다. 자꾸 웃음이 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렇게 오타 투성이 글을 타닥타닥 두드리고 있다. 내일 오늘의 글 소개할 시간에는 야야글 읽으라고 할텐데. 아이들이 내 준 숙제를 해야 하는데 이러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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