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26일(수) 추워서 따뜻한 물컵을 들고 다녀요.
요새 일학년들은 굵다, 짧다, 넓다, 좁다 그런 것들 공부하고 있어요.
오늘 수학 시간.
구자행이 전화 왔어요.
아이들이 길이대기 놀이를 한참하고 있어서 그냥 전화를 받았지요.
"야야, 많이 삐졌제? 우야노?"
난 전화가 반가우면서도 더 삐진 척을 해야잖아요?
"그래, 삐졌지. 말도 안한다, 인자"
"아아참, 우야노? 그랄라꼬 한 기 아인데....."
구자행이 미안하다면 그럴수록 난 더 삐져야되는데
그냥 실실 웃음이 나오잖아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래도, 흥! 이다"
그러고 있자니 아이들이 하나둘 놀다말고 날 봐요.
구자행 전화를 끊고 나니 보민이가
"왜 삐졌어요?"
"니는 길이대기 놀이는 안하고 와 내 전화 듣노?"
"다 들리던데요."
"안 갤차 줄거다."
여기저기서
"에이~ 누군데요?"
"선생님 남편이죠?"
"아아니"
"애인이예요?"
"아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친하게 말해요?"
"내가 어쨌는데?"
"막 웃으면서 애기처럼 말하데요?"
"애기처럼? 그기 어떻게 말하는 건데?"
"애인한테 말하는 거처럼요."
하하. 참내 요새 아아들은 모르는기 없죠?
다시 분위기 수습해서 대보기 공부를 했지요.
"연필보다 굵은 것을 찾아 보자"
색연필, 딱풀, 크레파스,.......
그런데 한 아이가 연필을 들고 여기저기 대보다가 "내 팔!"그러네요.
"맞다, 맞다. 우리들 팔도 연필보다 굵네."
학용품에서만 찾아보던 아이들이 다른 데로 눈을 돌린 게 반가웠어요.
"경준이 팔 굵네. 인자 다 컸다, 진짜로."
그러자 정현이가 큰 소리로
"꼬치" 그러는 거예요.
어찌나 우스운지 마구 웃었지요.
내가 키득키득 웃으니 다른 아이들도 따라 웃고.
한참 웃다가 정현이가 무안하겠다 싶어서
"그래 정현이가 잘 찾았네. 꼬치도 연필보다 굵지. 정현아 또 뭐 없을까?"
정현이가 한 다음 말에 난 고마 내 혼자 얼굴이 빨개졌어요.
"또 있어요. 오이요."
교실 창가에 고추며 오이가 많이 자랐거든요.
고추는 모종을 사다 심었더니, 열매가 맺히는데 보니 그게 꽈리고추네요.
그런데 또 꽈리고추가 그래 큰거는 첨봐요.
흙이 좋던지, 우리 아이들 정성 덕인지.
오이는 반찬 가게에서 세 개 천원에 파는 것보다 훨씬 더 굵고 길어요. 정현이는 창가에 달린 고추를 보고 말했는데
왜 나는 정현이 꼬치를 생각했을까?
괜히 내 혼자 딴 생각하고 한참 웃었지요.
하여튼 어른이 더 문제야.
내친 김에 아이들 이야기 하나 더.
어제는 하루종일 아이들하고 싸웠어요.
아니 싸운게 아니라 내 혼자 마구 화를 낸 거지요.
다시 쓸 종이상자를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놨다고 잔소리하고,
색종이를 귀퉁이만 잘라 쓰고 버렸다고 화내고,
짝지랑 어찌나 싸우는지 야단치고,
책도 하나도 안갖고 왔다고 뭐라 하다가,
학습지 정리 안하고 다 꾸겨서 사물함에 쳐박아놨다고 뭐라하고,
자꾸 머라하다보니 화가 점점 더 나는 거에요.
그럴수록 아이들은 하루종일 더 떠들고 말이 안 먹혀들고..
소리소리 지르다보니 이제 내 바람에 화가 가라앉질 않아요.
이러다가 마지막 남은 교양꺼정 다 달아나겠다 싶어
터질려는 속을 꽉 눌러앉히며 입을 꽉 다물었어요.
그러구러 집에 갈 시간이 되었어요.
그 중에서도 오늘 몇 가지나 걸려서 혼이 많이 난 태용이가
"선생님 오늘 축구 볼거지요?"
"몰라. 내 니한테 너무 화가 나서 대답해 주기 싫다."
"그러면 내일도 화 낼거예요?"
"몰라. 나중에 밤에 생각해보고."
태용이가 돌아서서 교실을 나가면서 그러네요.
"나는 선생님 화내면 학교 오기 싫은데......."
어찌나 미안하던지.
운동장을 지나 학교 앞 건널목에 서서
"태용아, 악수하자."
"인자 화 풀렸어요?"
"풀어보께. 그런데 빨리 안되네."
"뽀뽀해도 돼요?"
대답도 하기 전에 내 볼에다 뽀뽀를 딱 해주네요.
이런 아이들을 오늘 하루종일 데리고 악을 써 댄거 있죠?
내가 더 얼라고, 얼라들이 내 선생이라. (2002. 6. 26. 부산글쓰기회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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