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

<산골아이>에서 / 임길택

야야선미 2011. 1. 26. 11:01

외할머니 3 / 임길택


이날 이때껏

가진 땅이 없어

남의 일만 다니신 외할머니


어느 날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한테 이런 말을 하셨다.


"내가 많이 늙었나 보다.

고추 딸 때 꾀부리는 사람과는

이제 같이 따기 싫어."     ---<산골아이>(보리 2002)




늦가을 / 임길택


바람끝 거칠어지고

기온이 뚝 떨어졌다.


그 하늘 한 귀퉁이에

하루살이들 떼지어 난다.


흔들림 속

작은 것들이 보여 주는

살아 있음.


작은 것들이 이끌어 내는

그 흔들림 속

살아 있음.     ---<산골아이>(보리 2002)



나비 날개 / 임길택


거미줄에

흰 나비 날개 두 개

걸려 있다.


몸뚱이는

거미가 되었겠지.


나비가 되어 떠돌다가

거미가 되어 보는 꿈 꾸었을까.


나비는 날개로만 남아

거미줄에 걸린 채

내가 흰 나비였소 하고 말하고 있었다.     ---<산골아이>(보리 2002)



산골아이 22 _ 추석맞이 / 임길택


추석을 맞는다고

한지 창을 모두 떼어

땟국을 닦고

다시 창호지를 바른다.


수세미로 땟국을 밀 땐

힘만 들고 닦인 것 같지 않았는데

새로 붙인 창호지가 마르고 나니

햇살보다 더 하얗다.


할머니는

할머니 방 창 손잡이 가까이에

국화 꽃잎을 넣어 발랐다.

어머니 말씀이

할머니는 본디 멋쟁이라 했다.

나는 할머니 방 창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산골아이>(보리 2002)



산골아이 1 / 임길택


어머니와

산밭으로 가 콩밭을 매는데

윗골 한 두둑을 무엇이 다

뜯어 먹었다.

토끼가 한 짓이라 했다.


그 토끼를 잡아야겠다며

어머니가 웃으며 나를 보았다.


니가 걸음마를 배워

마당에서 놀 때

익지 않은 토마토도 따고

배추밭에 들어가

어린 싹을 부러뜨려도

할머니는 널 보고

"토끼 같은 우리 새끼."하며

귀여워하셨단다.


그 토끼가 배가 고파

좀 뜯어 먹은 걸

잡으면 어떡하니.


어머니는 딴 사람처럼 되어

이야기를 해 주셨다.     ---<산골아이>(보리 2002)




봄, 쇠뜨기 / 임길택


수건 쓴 아줌마 지나갔나?

그러면서

쇠뜨기는 다시 올라와요.    ---<산골아이>(보리 2002)


 

 


옥수수 타기기 / 임길택


기계로 미처 다 털지 못한

옥수수를 고무 대야에 담아다 놓고

도장방에 앉아 어머니와

송곳으로 타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손가락 사이에 물집이 잡히려 하며

아파 왔다.


그걸 어머니에게 내보이니

어머니가 웃으면서

손이 일을 알아보아 그렇다 했다.

지금 우리 나라에 이 일을 하는 아이는

나 하나뿐일지 모른다며

이다음 어른이 되어 손이 다 자라면

어릴 적 이 일들을 떠올릴 거라 했다.

그리고

남들이 안 해 본 이런 일들을 한 사람들이

옛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그 이야기 들으며 새 세상 아이들

꿈을 꾸며 자랄 거라 했다.     ---<산골아이>(보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