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 마을을 지나면서 / 임길택
하늘 흐리고
그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탄가루 인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은 집들 한 켠
바랭이풀 들어찬 땅 일구며
아주머니 한 분이
코스모스를 심고 있었다.
왜 혼자 하느냐고 물으니
호미질 멈추지도 않고
"이런 일은 하고 싶은 사람 몫이지요." 했다.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처마물 자리 / 임길택
양철 지붕에
비 오는 소리 들리고
이내
처마물 떨어지는 소리
들렸다.
마루 끝에
턱 괴고 나앉아
처마물 떨어지는 자리
바라보았다.
금세
흙탕물 거두어지고
물방울과 함께
하얀 모래 알갱이들이
살아 올랐다.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마지막 졸업식 / 임길택
학부형도 아닌 갓집 아저씨가
창 쪽에 둔 아이들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학교 역사를 읽는다.
1964년 분교로 문을 열어
1992년 2월을 끝으로 문을 닫는 학교 이야기
그 옆에 글 못 읽는 성희 할머니
나눠 준 종이 손에 든 채
운동장 터 내주었던 할아버지 생각하며
말없이 앉아 있다.
모처럼 차려 입은 한복 위로
봄 길목 햇살이 내린다.
첫 졸업생 성균이 아버지
산에서 파다 심은 나무 이야기를 하고
순진이 아저씨는
학교 터 닦을 때 나온 뱀 이야기를 하며
섭섭함을 달랜다.
이 모든 이야기들
이젠 어딘가로 떠나보낼 때 되었다는 듯
연통 가득 뿜어져 나가는 연기들도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흩어진다.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택시 할아버지 / 임길택
대머리 신원 개인택시 할아버지는
차를 몰고 내려가다가도
과자 먹고 있는 송이를 보면
차를 세워 그 과자 한 개
뺏어 먹고 가지요.
옆에 타고 있는 이웃 마을 아저씨
바쁘다는 말 대신 웃고 말지요.
차야 시동만 걸면 가지만
아이들은 아무 데서나 만날 수 없다고
할아버지 변명을 하시지요.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할아버지 요강 / 임길택
아침마다
할아버지 요강은 내 차지다.
오줌을 쏟다 손에 묻으면
더럽다는 생각이 왈칵 든다.
내 오줌이라면
옷에 쓱 닦고서 떡도 집어 먹는데
어머니가 비우기 귀찮아하는
할아버지 요강을
아침마다 두엄더미에
내가 비운다.
붉어진 오줌 쏟으며
침 한 번 퉤 뱉는다.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저녁 한때 / 임길택
뒤뜰 어둠 속에
나뭇짐을 부려 놓고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어머니는 무 한 쪽을 예쁘게 깎아 내셨다.
말할 힘조차 없는지
무쪽을 받아든 채
아궁이 앞에 털썩 주저앉으시는데
환히 드러난 아버지 이마에
흘러난 진땀 마르지 않고 있었다.
어두워진 산길에서
후들거리는 발끝걸음으로
어둠길 가늠하셨겠지.
불 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다시 이어지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
그 모든 소리들 한데 어울려
아버지를 감싸고 있었다.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가을 배추밭 / 임길택
흰나비는 날개를 접은 채로
밀잠자리는 날개를 편 채로
배추 포기 사이에 두고
잠들어 있었다.
늦잠을 자도 좋을 만치
밤새 무슨 얘기들 나누었을까.
등 뒤 하늘에 부는 바람 소리
그냥 말없이 듣기만 했을까.
찬 이슬에 젖은 날개들을
햇살이 가만가만 말리는 사이
나는 발소리 죽여
살며시 그 곁을 떠났다.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새앙쥐 / 임길택
식구들 잠든 사이
새앙쥐 한 마리가
부엌으로 나왔다.
이 추운 겨울 밤
무슨 사정 생겼을까.
내쫓지 말아 달라는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러나 새앙쥐야,
우리 부엌엔
네가 가져갈 게 아무것도 없어.
누룽지마저 일기 쓸 때
내가 다 먹은걸.
아니야, 있다.
그래 맞아,
어머니가 불 지핀 부뚜막이
아직은 따뜻할 거야.
새앙쥐야,
한겨울 밤 새앙쥐야,
남은 그 불기라도 가져가렴.
온 식구들 불러다
한껏 안아 나르렴.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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