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

<할아버지 요강>에서 / 임길택

야야선미 2011. 1. 26. 11:04

탄광 마을을 지나면서 / 임길택


하늘 흐리고

그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탄가루 인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은 집들 한 켠

바랭이풀 들어찬 땅 일구며

아주머니 한 분이

코스모스를 심고 있었다.


왜 혼자 하느냐고 물으니

호미질 멈추지도 않고

"이런 일은 하고 싶은 사람 몫이지요." 했다.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처마물 자리 / 임길택


양철 지붕에

비 오는 소리 들리고


이내

처마물 떨어지는 소리

들렸다.


마루 끝에

턱 괴고 나앉아

처마물 떨어지는 자리


바라보았다.


금세

흙탕물 거두어지고

물방울과 함께

하얀 모래 알갱이들이

살아 올랐다.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마지막 졸업식 / 임길택


학부형도 아닌 갓집 아저씨가

창 쪽에 둔 아이들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학교 역사를 읽는다.

1964년 분교로 문을 열어

1992년 2월을 끝으로 문을 닫는 학교 이야기


그 옆에 글 못 읽는 성희 할머니

나눠 준 종이 손에 든 채

운동장 터 내주었던 할아버지 생각하며

말없이 앉아 있다.

모처럼 차려 입은 한복 위로

봄 길목 햇살이 내린다.


첫 졸업생 성균이 아버지

산에서 파다 심은 나무 이야기를 하고

순진이 아저씨는

학교 터 닦을 때 나온 뱀 이야기를 하며

섭섭함을 달랜다.


이 모든 이야기들

이젠 어딘가로 떠나보낼 때 되었다는 듯

연통 가득 뿜어져 나가는 연기들도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흩어진다.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택시 할아버지 / 임길택


대머리 신원 개인택시 할아버지는

차를 몰고 내려가다가도

과자 먹고 있는 송이를 보면

차를 세워 그 과자 한 개

뺏어 먹고 가지요.


옆에 타고 있는 이웃 마을 아저씨

바쁘다는 말 대신 웃고 말지요.


차야 시동만 걸면 가지만

아이들은 아무 데서나 만날 수 없다고

할아버지 변명을 하시지요.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할아버지 요강 / 임길택


아침마다

할아버지 요강은 내 차지다.


오줌을 쏟다 손에 묻으면

더럽다는 생각이 왈칵 든다.

내 오줌이라면

옷에 쓱 닦고서 떡도 집어 먹는데


어머니가 비우기 귀찮아하는

할아버지 요강을

아침마다 두엄더미에

내가 비운다.

붉어진 오줌 쏟으며

침 한 번 퉤 뱉는다.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저녁 한때 / 임길택


뒤뜰 어둠 속에

나뭇짐을 부려 놓고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어머니는 무 한 쪽을 예쁘게 깎아 내셨다.


말할 힘조차 없는지

무쪽을 받아든 채

아궁이 앞에 털썩 주저앉으시는데

환히 드러난 아버지 이마에

흘러난 진땀 마르지 않고 있었다.


어두워진 산길에서

후들거리는 발끝걸음으로

어둠길 가늠하셨겠지.


불 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다시 이어지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

그 모든 소리들 한데 어울려

아버지를 감싸고 있었다.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가을 배추밭 / 임길택


흰나비는 날개를 접은 채로

밀잠자리는 날개를 편 채로

배추 포기 사이에 두고

잠들어 있었다.


늦잠을 자도 좋을 만치

밤새 무슨 얘기들 나누었을까.

등 뒤 하늘에 부는 바람 소리

그냥 말없이 듣기만 했을까.


찬 이슬에 젖은 날개들을

햇살이 가만가만 말리는 사이

나는 발소리 죽여

살며시 그 곁을 떠났다.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



새앙쥐 / 임길택


식구들 잠든 사이

새앙쥐 한 마리가

부엌으로 나왔다.


이 추운 겨울 밤

무슨 사정 생겼을까.

내쫓지 말아 달라는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러나 새앙쥐야,

우리 부엌엔

네가 가져갈 게 아무것도 없어.

누룽지마저 일기 쓸 때

내가 다 먹은걸.


아니야, 있다.

그래 맞아,

어머니가 불 지핀 부뚜막이

아직은 따뜻할 거야.


새앙쥐야,

한겨울 밤 새앙쥐야,

남은 그 불기라도 가져가렴.

온 식구들 불러다

한껏 안아 나르렴.    ---<할아버지 요강>(보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