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네가 사는 이야기

전기에 기대어 사는 나부터 바로 세워야

야야선미 2011. 5. 30. 11:00

전기에 기대어 사는 나부터 바로 세워야

  아파트 관리실에서 한 열흘 전부터 하루에 몇 번씩 안내 방송을 해댄다. 이틀 동안 전기 공사를 크게 할 예정이고 그래서 낮 동안에는 전기가 끊어질 테니 집집이 알아서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전기 끊긴다는 날이 다가오도록 손 쓸 일이 별로 없다. 물통에 물 받아 두듯 전기를 미리 내려 받아 둘 수도 없고. 냉장고에 든 것들이나 미리미리 꺼내 먹고 더 사지는 말아야지 하는 정도.

  그러고 보니 냉장고가 큰일이다. 김치냉장고에 가득 든 김장김치는 어떡하나? 요즘처럼 더운 날, 김치를 이틀씩이나 밖에 내놓으면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못 쓰게 될 텐데. 창고처럼 쓰는 냉동실은 또 어쩌라고? 먼저 냉동실부터 해치우자. 웬 떡이 이리 많으냐. 쑥떡, 팥시루떡, 인절미, 송편, 호박떡, 가지가지 참 많기도 하다. 지난 설에 큰집에서 가져오고, 친정에서 제사 지내고 가져온 것들이다. 팥시루떡은 겨울방학 때 앞집에서 준 이사 떡이다. 송편은 지난해 추석에 얻어 와서 그대로 있다. “미친 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쑥떡을 꺼내 찐다. 냉동실을 다시 뒤진다. 콩고물이 좀 있다. 쪄낸 쑥떡을 콩고물 묻혀 동글동글 다시 만들고 인절미도 노릇노릇 구웠다. 경비실에 한 접시 드리고, 우리 동네 고샅길 할매들한테 들고 간다. “우얀 떡이고?” 심심하게 앉았던 할매들이 반갑게 받아 주신다. “금방 했는가베? 집에서 했나, 몰랑몰랑하이 잘 됐네”냉동실에 있던 거라고 말하기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전기 끊긴다 해서 냉동실 좀 치웠어예. 내일은 호박떡하고 팥시루떡 좀 쪄 올께예” 맛나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더 부끄럽다. 진작에, 더 맛있을 때 나눠 먹지.

  오후 내내 냉동실을 붙잡고 있다. 고춧가루랑 볶은 깨 꺼내서 열어놓고. 팥이야 뭐야 잡곡들 죄다 꺼내서 펼쳐 놓는다. 꽁꽁 언 생선이 제법 나온다. 지난 설에 누가 준 것들인데 이게 아직도 있었구나. 냉동실이 터져라 쑤셔 넣다 보니 자꾸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어머님 제사 지내고 얻어 온 구운 조기도 한 마리 있다. 주먹 만한 봉지 몇 개가 나온다. 지난 김장 때 쓰고 남은 굴이다. 굴 국밥 해 먹자고 몇 봉지 넣어 두었는데. 딸기도 있다. 딸기 샤베트 해 준다고 지난해 넣어 두었지. 시래기 삶은 것, 죽순 데친 것, 무말랭이, 재첩국도 몇 봉지. 지난 가을, 동무네 고추밭 놓을 때 끝물고추 얻어다 쫑쫑 썰어 얼려 놓은 것도 두 봉지나 나온다. 대파 썰어서 얼린 것도. 이것들은 꺼내 놓으면 바로 물러져서 다시 쓰지 못할 텐데. 하나하나 꺼낼 때마다 ‘미쳤지, 미쳤어’가 절로 나온다. 잔뜩 꺼내 놓은 걸 내려다보니 내 속에 꽉 찬 욕심이 그대로 다 드러나 보이는 듯하다. 또 “미친 년!” 하고 한숨을 내뱉는다.

  제때 다 먹지도 못할 걸 얻어 오긴 왜 얻어 와서 썩히느냐 말이다. 많으면 이웃에 나눠 먹든가. 뭔 욕심이 많아서 이리 처넣어 두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사냐고, 미쳤지 미쳤어! 혼자 욕을 한참 끓여 퍼붓다가 정신 차리고 생선을 고른다. 고추 얼린 것, 대파 얼린 것, 생선, 먹을 만한 것들을 골라서 고샅길 할매들한테 간다. 잘 먹겠다고 고마워하시는데 어찌나 죄스러운지 도망치듯 나온다. 신선할 때 나눠 드렸으면 얼마나 좋노? 집으로 들어올 때까지 뒤꼭지가 따갑다. ‘이참에 냉장고 하나는 꼭 내놓고 만다.’ 지지난해 큰 냉장고 들이면서 헌것 버리기 아까워서 그대로 두고 썼는데, 지금 그것마저 꽉 차 있다. 이렇게 쓰다가는 셋이면 셋, 넷이면 넷 모두 꽉 채울지 모르겠다. 작은 냉장고 하나였을 땐 그런대로 꼭 필요한 것만 넣고 살지 않았느냐고.

  아침 먹고 식구들 다 나가고, 벼르던 글 좀 쓰느라 앉았는데 갑자기 어두워진다. 드디어 전기가 끊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침 먹고 한참 지났는데도 불을 켜고 있었다. 불이 없어도 보일 건 다 보이고 아무 불편할 것 없는데, 조금 어두운 것도 못 참고 아침나절까지 불을 켜고 있었구나. 이것도 병이야 병. 구시렁대면서 하던 일을 하는데 좀 있으니 컴퓨터 화면도 어두워진다. 배터리를 충전하든지 전원을 꽂으라는 말이 나온다. 그럼 뭘 하지? 전기가 없으니 글도 못 쓴다, 참내.

  집안을 휘이 둘러본다. 그래 미뤄 놓은 설거지나 하자. 뭔 대단한 일 한다고 어제 저녁 먹은 것도 쌓여 있다. 물이 안 빠진다. 물구멍에 붙인 음식물 분쇄기 때문이다. 이 기계를 돌려서 음식찌꺼기를 싹 갈아 내려야 하는데 전기가 없으니 찌꺼기가 그대로 모이고 물도 안 빠진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나가지 않아 좋더니, 전기가 없으니 이게 또 애물이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청소를 한다. 여기저기 널린 것들 집어서 제자리 갖다 두고 청소기를 꺼낸다. 무심코 청소기를 끌고 나오다 아차 한다. 참, 전기가 없지. 청소기를 도로 가져다 두고 빗자루를 찾는다. 앞 베란다로 뒷 베란다로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빗자루가 없다. 얼마나 오랫동안 쓰지 않았으면 어디 둔지도 모를까.

빨래통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오랜만에 손빨래 좀 하자. 빨래판을 놓고 박박 문지른다. 쪼그리고 앉은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찬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하면 좋으련만, 둘레둘레 살피다 목욕의자를 가져다 놓고 주저앉는다. 빨래 몇 가지 주물러 빨 동안도 쪼그리고 버티질 못하다니. 참 앞날이 갑갑하다. 청바지를 빤다. 이건 쉽지가 않다. 물을 잔뜩 먹어서 뻐덩뻐덩 무겁고 만만치가 않다. 숨을 헐떡이며 씨름을 하다 결국엔 목욕통에 걸쳐 놓는다. 전기 들어오면 세탁기로 다시 빨 셈이다.

  설거지도 못 마쳐, 청소기도 못 돌려, 손빨래도 힘들어, 컴퓨터도 못 해. 집에 있어도 집안일을 할 수가 없다. 이것뿐인가 어데. 전기밥솥도 멈췄고 화장실 비데도 못 쓴다. 어수선하고 쑥쑥하기 이를 데 없다. 문을 쾅쾅 두드려 대서 ‘아, 벨을 눌리지’ 하고 짜증을 부리다 보니 그것도 전기가 끊긴 탓이다.

  이틀째는 좀 낫다. 빗자루도 찾았고, 손걸레도 다시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허리 굽혀 구석구석 쓸어 내고, 방 구석구석 기어 다니면서 손걸레로 반들반들 닦는다. 스팀걸레질 아무리 하면 뭘 해, 구석구석 때는 그대로 있는데. 다 닦고 나니 무릎도 아프고 숨이 좀 차긴 하지만 개운하다. 내친 김에 어제 빨다만 청바지도 빤다. 목욕통에 청바지 두 개를 넣고 밟는다. 바락바락 밟다 보니 머리 밑에 땀이 밴다. 물 한 잔 마시고 청바지를 흔들어 헹군다. 더워서 겉옷 하나를 벗어 던진다. 다 헹군 청바지를 탈탈 털어 널고 나니 등줄기가 따갑고 온몸에 땀이 배어 나오고 뻐근해온다. 이 얼마 만인가. 땀이 배도록 집안일 한 게. 청소기한테, 스팀걸레에, 세탁기에 모든 일 다 내맡기고 손가락 얄랑얄랑하고 살았지.

  창가에 널린 빨래를 뿌듯하게 내다보며 물 한 잔 들고 앉아 숨을 돌리는데, 스멀스멀 부끄러운 생각들이 밀려든다. 몸이 늘 찌뿌듯하다고, 운동이 부족해 그렇다고 한걱정을 해댔지. 빗자루질, 걸레질, 식구들 빨랫감까지도 전기한테 다 내맡기고 얄랑얄랑 살면서 말이다.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짓 투성이다. 전기냉장고 믿고 싱싱한 것 가져다가 다 먹지도 못하고 처넣어 두었다 결국은 찜찜하다고 버리지. 미친년! 꼴랑 4층밖에 안 되는 걸 엘리베이트 타고 다니면서, 등산을 해야 한다고 나서지.

  그러면서 전기 함부로 쓴다고, 그래서 핵발전소 자꾸 만들어 위험하게 만든다고 목에 핏대를 세운다. 일본에서 핵발전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언제 큰 지진이나 지진 해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나라에서 그렇게 위험천만한 핵발전소를 무더기로 짓는 것부터가 폭력이라고 핏대를 세웠더랬지. 고리, 월성에 더 세운다는 핵발전소를 반대하면서 내가 전기에 얼마나 기대고 사는지는 돌아보지 못했다. 청계천과 전국 곳곳에 겨울마다 화려하게 부활하는 색색깔의 불빛 축제들을 욕만 했지, 전기한테 내 삶을 서서히 내 주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도 못했다. 도시에서 무지막지하게 쓰는 전기 끓여다 대느라, 초고압 송전선이 지나가는 우리 나라 곳곳이 멍들고 지쳐 가는데, 도시에 사는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산다고 욕은 잘했다.

  입에 담기 부끄럽지만, 핵발전소 하나 더 짓게 만드는데 나도 한몫하고 있었던 셈이다. 조금 편해 보고자 내 몸 움직여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들 죄다 전기한테 내 주고 있지 않나. 이틀 전기 없어 보니, 우리 집에서 전기로 쓰는 물건 가운데 반 넘게는 없어도 될 것들이다. 냉장고에서 썩어 나가는지도 모르고 빼곡하게 채워 둔 욕심 덩어리들. 이런 것들도 냉장고 하나만 쓰면 그만큼 줄어들 테지.

  전기한테 기대어 사는 부끄러운 내 삶을 조금만 바로 세워도 핵발전소 하나쯤은 거뜬히 물리칠 수 있겠다. 나도 모르게 내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 선 핵발전소부터 몰아내야겠다. 핵발전소 더 짓지 마라 소리치면서, 안으로는 나부터 다잡고 실천할 일이다. ������

'야야네가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여븐 할매 말쌈   (0) 2015.08.22
군더더기가 없는 몸  (0) 2011.07.09
봄날  (0) 2011.04.13
단순하게 더디게 소박하게, 몸은 가볍게  (0) 2010.10.23
봄잠을 깨우는 그림 한 장  (0) 2010.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