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 시 한 편 2011.07.31
솔아 푸른 솔아/박영근 솔아 푸른 솔아 - 백제 6 / 박영근 부르네 물억새마다 엉키던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 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 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 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 주저앉아 우는 누이들 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 시 한 편 2011.07.20
<김진숙한테 띄우는 시> "일어나자 일어나 이 밤을 뚫자" / 백기완 <김진숙한테 띄우는 시> "일어나자 일어나 이 밤을 뚫자" / 백기완 비바람 밤새 덜컹대더니 마흔다섯 해 동안 다져진 사무실 어지럽게 비가 샜다 쉰 해 앞서 꾸민 ‘해방통일’ 글묵(책)도 젖고 그런데 저 무쇳덩이 높은 다락에 김진숙은 얼마나 젖고 있을까 눈을 못 붙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 시 한 편 2011.06.29
선암사 / 정호승 선암사 /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 시 한 편 2011.06.18
눈길 / 하인애 눈길 / 하인애 꼬박 이틀을 공장에서 보내고도 해가 지고 나서야 겨우 출하 물량을 맞추고 올겨울은 웬 눈이 이렇게 오는지 눈길을 걸어 휘청휘청 집으로 돌아온 밤 그새 냉골이 된 방에 보일러를 돌리고 찬 이부자리를 체온으로 녹이며 누우니 잠은 쏟아지는데 정신은 말똥말똥 머리맡에는 잠들지 못.. 시 한 편 2011.01.29
감 한 쪽 외 / 김환영 감 한 쪽 / 김환영 겨울비 오고 어두운데 까마귀 한 마리가 입에 불을 달고 날아간다. 찬비를 맞으며 감 한 쪽 물고 가는 어미 까마귀 부리 끝이 숯불처럼 뜨겁다. ---<글과 그림>(2008년 12월호) 질경이 도로 / 김환영 집으로 들어오는 스무 발 남짓한 흙길 한 가운데 질경이들이 새파랗다. 석유차도 들.. 시 한 편 2011.01.26
<감자꽃>에서 / 권태응 북쪽 동무들 / 권태응 북쪽 동무들아 어찌 지내니? 겨울도 한 발 먼저 찾아왔겠지. 먹고 입는 걱정들은 하지 않니? 즐겁게 공부하고 잘들 노니? 너희들도 우리가 궁금할 테지. 삼팔선 그놈 땜에 갑갑하구나. ----1948년<감자꽃>(창비 1994) 없는 살림일수록 / 권태응 뭣이든지 일을 하곤 밥 먹기. 많이 벌.. 시 한 편 2011.01.26
맷돌 외 / 이문구 맷돌 / 이문구 예전엔 생활도구였어. 콩과 메밀을 갈아 두부랑 묵을 쑤고 팥과 녹두를 타서 떡을 했지. 밀을 갈면 전을 부치고 엿기름을 타면 엿을 고았지. 보리죽이며 귀리수제비며 부잣집도 가난한 집도 이 맷돌 없이는 못 살았어. 당연히 툇마루나 대청의 터줏대감으로 마당은커녕 뜰도 밟지 않고 .. 시 한 편 2011.01.26
<탄광마을 아이들>에서 / 임길택 햇빛 / 임길택 아버지는 가끔 하늘 올려다보며 말씀하셔요 햇빛이 없으면 이 세상 어떻게 될까 굴 속 걸어나올 때마다 점점 밝아지는 길 밟으며 세상 밖으로 나올 때마다 햇빛처럼 반가운 게 없대요 햇빛처럼 그리운 게 아무것도 없대요 탄을 캘 땐 까마득히 잊었다가도 굴 속을 빠져나올 때면 온 세상.. 시 한 편 2011.01.26
<할아버지 요강>에서 / 임길택 탄광 마을을 지나면서 / 임길택 하늘 흐리고 그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탄가루 인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은 집들 한 켠 바랭이풀 들어찬 땅 일구며 아주머니 한 분이 코스모스를 심고 있었다. 왜 혼자 하느냐고 물으니 호미질 멈추지도 않고 "이런 일은 하고 싶은 사람 몫이지.. 시 한 편 2011.01.26